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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아저씨

in 백암아트센터, 2018.09.05 8시 공연



 

 

임소하(임혜영) 제루샤 애봇, 신성록 제르비스 펜들턴. 임루샤, 톡다리. 임톡 페어.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이 극을 이제서야 만나고 왔다.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극이자, 여성과 남성이 한 명씩 등장하는 2인극. 어릴 적 읽었던 소설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 아름다운 동화 같은 극이었다. 제루샤는 2막에서 딱 한 번 아주 잠깐 객석 시야에서 사라질 뿐, 공연 내내 무대 위에 서 있는다. 이야기 특성 상 제루샤의 편지 위주로 극이 흘러갈 수밖에 없다보니, 대사와 가사도 분량이 엄청나다. 자존감이 강한, 사랑스러운 임루샤가 너무나 반짝여서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귀엽고 멋지고 예쁘고 눈부신 임루샤가 풀어내는 경험과 생각과 이야기가 무척 애틋하고 다정하고 따스했다. 톡다리는 배우 자첫이었는데, 표정 연기가 크고 시원시원하면서도 섬세한 감정선을 풍부하게 담아내어 인상적이었다. 요소요소의 웃음 포인트들을 전부 짚어 표현해줘서 극 내내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두 배우가 각각 대사를 살짝 씹는 등 실수가 없진 않아서 기술적으로 완벽한 공연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감정으로 풍성하고 아름답게 이야기를 풀어내어 아주 행복한 관극이었다.

 

 

막연하지만 한계 없는 꿈을 꾸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시절에는, 소설 속 제르비스 같은 사람이 나에게도 나타나주길 바랐다. 땅에 발을 붙인 채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에 잠식된 현실을 살고 있는 지금은, 굳건한 영혼의 용기를 품고 행복을 노래하며 꿈을 꾸는 제루샤에게 위안과 힘을 건네 받았다. 제루샤 개인의 성장담이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변화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객석의 관객에게 손을 내민다. 당신도 변할 수 있다고. "미지의 두려움을 떨쳐내" 고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을 느끼면서 살" 라고. 이 가사들이 담긴 <행복의 비밀(The Secret of Happiness)> 넘버와 "오 캡틴 마이 캡틴" 라는 가사가 있는 <내가 몰랐던 것들(Things I Didn't Know)> 넘버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연상시켰다. 전자 'Carpe Diem' 은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이고, 후자 'O Captain My Captain' 19세기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구다. 1908년부터 약 4년 이후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이 극과, 1988년 작인 영화가 해당 고전을 각기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Carpe Diem 을 고등학교 때부터 인생관으로 삼고 있는지라, 저 두 넘버가 가장 마음을 울렸다. 아쉬운 대로 프레스콜을 돌려보고 있는데, 셔터 소리가 심해서 아쉽다. 달컴이 오슷을 내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몰랐던 것들> 넘버 참고: http://www.themusical.co.kr/Magazine/Detail?num=3848)

 

 

책이 가득한 무대가, 백암보다는 이전 시즌의 대명이 훨씬 잘 어울릴 이미지인 건 아쉬웠다. 조명도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연출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전반적으로 너무 어두침침하고 답답했다. F열 통로 쪽이었음에도 임루샤 표정이 명료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백암 극장 조명 자체가 흩어지고 힘없는 빛을 내는데, 장면마다 달라져야 하는 조도 조절이 분명하지 않으니 전반적인 극의 긴장감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 특히 락윌로우나 마지막 장면 등에서 조명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극적인 연출이 아쉬웠다. 오케 반주 음향은 나쁘지 않았는데, 배우 마이크 음향이 별로였다.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가사와 대사가 몇 있었는데, 가사의 경우 반복되는 넘버가 많아서 극 이해에 큰 문제는 없었다. 백암은 헤드윅이나 솜 덕분에 애틋한 공간이지만, 공연장으로서의 기능은 매우 부족하여 선호하지 않는다.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극을 자첫하여 즐거웠다. 이 극을 사랑하는 배우들이 온 마음을 담아 무대 위에 서있다는 게 느껴져서, 객석에서도 무척 행복하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었다. 정말 흔치 않은, 불편하거나 거슬림이 하나도 없는 극이어서 더욱 사랑스러운 공연이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극을 펼쳐 읽어내리며 함께 이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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