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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주절/Daily

180629

누비` 2018. 6. 29. 00:30

01. 

이번 월드컵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스웨덴전은 아예 안 봤고, 멕시코전은 두 번째 골 먹힐 때까지 보고 말았으며, 독일전은 후반전만 텍스트와 옆집 함성 소리로 들었다. 스웨덴전에서 그렇게 욕을 먹던 것과 다르게, 멕시코전은 상당히 잘 뛰어줘서 재미있게 봤다. 독일전은 멕시코가 스웨덴에게 처참히 깨지면서 우리의 16강 진출이 좌절되었음을 이미 알아 버렸기에 굳이 영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전 후반부, 특히 연장타임의 경기가 워낙 흥미진진하고 극적이어서, 보지 못했어도 즐겁더라. 인터넷 상에 쏟아지는 온갖 드립과 합성 짤들이 어찌나 유쾌하고 무해하던지,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세계적인 축제를 비로소 마음껏 즐긴다는 기분이 들었다. 


02. 

한국인은 유난한 해학의 민족이다. 민족주의 개념의 맥락보다는, 지리적 역사적 요인들에 의해 형성된 전반적인 성향으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동음이의어나 비슷한 단어들이 수없이 많은 언어,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 덕분에 재치 넘치는 비유가 쏟아진다. 인터넷이 몹시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합성이나 드립 등이 엄청난 속도로 퍼지는 과정 속에서 보다 다양하게 변형되고 파생되는 유머들도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괴감이나 절망, 비아냥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승화시키는 해학이 득세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쁨과 자랑, 뽐냄을 보다 효율적이고 센스 있게 표현하기 위한 유머가 많아졌다. 


03. 

언급한 '어느 순간' 을 곰곰히 짚어보면, 아무래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범국민적 촛불 시위 즈음인 듯하다. 9년 간 절망으로만 치닫는 양극화의 사회에서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고 우울함과 박탈감, 자괴감에 짓눌려 무채색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저마다의 고유한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유머는 현실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도피처 정도의 역할로 소비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통스런 현실에 맞서 정의를 직접 성취해내는 경험을 했고, 이를 통해 여유와 안정, 신뢰와 의지를 되찾게 됐다. 이로 인해 유머는 보다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감정을 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화됐다. 근래에는 헬조선, 이라는 단어보다 오히려 국뽕, 이라는 단어가 훨씬 자주 보인다. 한국을 지긋지긋해 하며 기회만 된다면 당장 떠나리라 결심하던 청춘들은, 끈기와 믿음을 가지고 이 나라를 바라보고 지켜내겠다 말하고 있다. 물론 모든 국민들이 이런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는 이렇게 변하고 있다고 본다. 수많은 별개의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속 갈등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데, 그 문제들을 마주하는 자세와 시야와 입장이 이토록 자유롭고 다양한 분위기가 조성된 것 자체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04.

유머와 해학의 대상과 본질이 몇 년 전과 비교하여 사뭇 달라졌음을 말하고 싶어 시작한 글이었는데, 적다 보니 눈 앞에 쌓여있는 온갖 이슈들이 하나씩 떠오르며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래도 사회가 아주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산발적으로 생성되고 있는, 거대한 시대 흐름 속 변곡점이라고 믿고 있다. 


05.

다시 수요일 저녁으로 이야기를 돌리면, 독일전 전반전을 못 본 이유는 프랑켄 관극 때문이었다. 11시에 공연이 끝나고, 류배우님 팬클럽 건승정한에서 주최하는 첫공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난다고 믿는데다가, 공연이 끝나면 극의 여운에 젖어 빠르게 귀가하는데 급급하여 퇴근길 자체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프랑켄슈타인은, 삼연에 배우님이 참여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벅차서 어떻게든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마구 솟아나더라. 그래서 일단 분위기를 탐색하러 첫공모임에 가봤고, 각오했던 것보다 빠른 시간에, 무려 분장도 지우지 않은 채 나와주신 류배우님의 미모에 치여버렸다ㅠㅠ 사진으로는 절대 담기지 않는, 이 세상 미모가 아닌 듯한 말끔한 얼굴과 우아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새삼 마음을 빼앗겼다. 무척 짧은 인사였음에도 전혀 아쉽지 않았던, 배우와 팬 사이의 존중과 감사가 뚝뚝 묻어나는 따뜻한 시간이었다. 아이돌 덕질과 비교하여 무척 젠틀하고 질서정연한 팬분들 덕에 편안하기도 했다. 공연 끝나기 전에 한 번 쯤 더 가서, 감사 인사라도 해보고 싶다.


06.

퇴근길까지 가보다니, 비로소 류배우님의 진성 덕후로 쾅쾅 도장 찍은 기분이다. 독고다이로 덕질하는 편이라서, 덕친을 만들거나 모임이나 행사에 참석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은 여전히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뭔가 틀을 하나 깬 듯한 기분도 들고, 여러모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07.

덕질로 이토록 충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이 기쁘다.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고 의욕 없는 일상을 살다가, 관극 하나만으로 넘치는 생기를 얻었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몹시 좋아하는 극을 해주니 온 세상이 환하게 빛나는 것만 같다. 극 자체는 절망과 어둠으로 점철된 비극임에도. 8월 중순까지는 현업도 매우 바쁠 예정이라서, 관극과 현업을 균형있게 병행하며 컨디션을 유지하는데 온 힘을 다 할 생각이다. 힘들고 피곤하겠지만, 아직은 그저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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