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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in 샤롯데씨어터, 2018.03.28 8시 공연

 


 

 

류정한 지바고, 조정은 라라, 최민철 코마로브스키, 이하 원캐. 강필석 파샤, 이정화 토냐. 류바고, 선녀라라, 미남코마롭, 요정파샤, 작정토냐. 류선녀미남. 류바고 자셋.

 

 

드디어 이 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따라잡았다. 회차를 거듭하며 더욱 농밀해진 배우들의 노선 덕도 있지만, 1열 중앙이라는 좋은 자리와 더불어 3번째 관극이었다는 이유가 크다. 이는 개연성이 부족하여 주제조차 명확하지 않은, 소위 '대서사시' 라 자칭하는 이 극의 전개를 이미 알고 있기에 각각의 인물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시대의 풍파에 휩쓸려 흔들리는 지바고와 라라와 파샤와 토냐,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이 감당해야만 했던 인생이 이해가 되고 공감으로 이어지며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입덕 이후로 자둘, 자셋부터 극이 재미있어지는 경험을 직접 해보기도 했고 주변에서도 더러 접하고는 하는데, 이건 극이 부족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관객이 단 한 번만 공연을 본다는 가정 하에 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합리적이고 당연한 조건을 왜 생각하지 않는 걸까. 초연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래도 이날 관극은 행복하고 즐거웠으니, 평소처럼 극 내용에 대해 풀어보려고 한다. 그 전에 음악감독한테 짜증만 한 번 내고 시작하겠다. 애쉬즈 마지막 절정에서 무반주로 류바고가 울먹이며 노래하는데 물통 대차게 넘어뜨리며 우당탕 소리 내면 집중이 깨져요 안깨져요? 지휘하면서 팔 올릴 때 숨은 왜 그렇게 크게 들이 마시는 거며, 박자는 왜이렇게 달리는 건지. 뮤지컬은 라이브 특성 상 항상 음감과 배우가 상호교류를 통해 합을 맞추며 완성시키는데, 이 극을 볼 때는 항상 배우가 오케에게 맞춰주는 느낌을 받는다. 모든 장면에서 배경음악까지 넣느라 쉼없이 고생하는 건 알겠는데, 관객들이 불만 가지는 지점은 좀 고쳐줬음 좋겠다. 



※스포있음※



'지바고' 라는 이름 아래 그의 일대기를 그리는 극 안에서, 류바고는 일생을 걸쳐 마주하게 되는 경험과 기억과 갈등과 고난을 점진적으로 누적시키며 변화한다. 이전 관극에서는 와닿지 않았던 그의 번뇌와 자기합리화와 슬픔과 절망이, 고스란히 납득됐다. 1막에서 두드러진 건 라라를 향한 사랑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이전 공연에서는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 우연한 재회들로 맞물리며 사랑이라는 감정이 숨길 틈 없이 터져나왔다면, 이날 공연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쌓여가는 호기심이 놀라움과 경탄과 신비함을 야기시키며 호감으로 이어지다가 종국에는 Now 넘버에서 얀코의 편지 속 "사랑해" 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사랑이 폭발하듯 터진다. 스카프를 떨어뜨린 라라와의 첫만남에서 류바고의 얼굴에 찰나의 놀라움이 스쳤다. 총을 쏘고는 빗맞췄다고 노여워하는 라라의 얼굴을 발견했을 땐 경악이 어렸다. 코마로프스키와의 대립 후 뛰쳐나가는 순간 자신을 쏘아보는 라라의 눈빛을 마주했을 때는, 류바고의 표정에 혼란과 의문, 그리고 이글거리는 날 것의 분노와 열정을 마주한 두려움이 어렸다. 제 인생에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뜨겁게 불타는 열망을 코앞에서 마주한 순간,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생경한 것에 대한 공포가 표현되는 류바고의 감정이 너무 좋았다. 그 순간에도 그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코마로프스키의 앞을 본능적으로 막아서는, 미남코마롭을 쳐다보지 않고 한 발자국 내딛는 디테일도 훌륭했다. 물론 이어지는 코마롭의 대사에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그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작고 어리고 불안해보이는 청년의 모습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날 류바고는 코마로브스키를 거북해하고 내심 경멸하면서도 그걸 드러낼만한 용기나 의지가 부족해보였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시와 관련하여 제 의지를 굽히는 장면에서도 코마로브스키가 지바고를 아주 잘 알아서 마치 타이르는 듯이 그를 설득할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느낌이었고, 지바고는 분해하면서도 무력하게 설득당하는 모습이었다. 미남코마롭이 이 장면과 2막 끝에서 지바고를 '유리' 라고 부르는 디테일 좋았다. 아무튼 류바고는 호기심과 궁금함으로 확장되는 라라를 향한 감정이 놀랍고 익숙치 않아 혼란스러워하며 Who Is She 넘버를 부른다. 넘버 마지막에 손을 내미는 토냐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이다가 그 손을 잡고 무대 하수로 퇴장하면서 복잡한 감정이 어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것도 좋다. 류배우님의 이전 작품에서 만나보지 못했던 디테일이 있는데, 혼란스러운 기색을 가득 담은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는 눈빛이다. 따라잡기 벅찬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서 뒤쳐진 채, 고민하고 갈팡질팡하는 우유부단함과 고지식하게 이상을 그려내지만 실천은 하지 못하는 유약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디테일이어서 놀라웠다. 동시에 감정의 변화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해서 지바고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편했다. 이전 작품에서는 매번 고고하고 기품 있는 귀족의 지위 위에서 고통 받고 절망하며 번뇌했다면, 이 작품은 시대의 거대한 흐름 앞에 그 위치에서 쫓겨나고 이리저리 휘둘린다. 노선이 강하든 약하든 이 차이를 인지하고 구분되는 지점을 정확하게 보여주길 바랬는데, 이날 류바고가 완전하게 지바고라는 인물을 그려내줘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다. 



전쟁터에서 라라를 만나고 그의 시를 읽어보았다 말해주는 그의 말들에 기쁨과 벅참을 느끼는 류바고. 함께 얀코를 치료하며 '기적' 을 경험하고 라라의 행동에 경탄과 경외심을 느끼며 토냐에게 보내는 편지에까지 그의 칭찬을 빠뜨리지 못한다. 얀코 치료하는 장면에서 "있잖아, 굉장히 아플거거든?" 하는 어조 어미 목소리 진짜 사랑해서 새삼 치였었는데, 이날 관극에서는 "얀코," 하며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줘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친절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지바고를 보여주는 애드립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저 "있잖아," 하고 말하는 톤과 표정이 너무 좋았단 말이다ㅠㅠ 얀코의 이름을 여러 번 불렀기에, 눈 앞에서 그 특별한 생명이 스러지는 절망이 더욱 극적으로 표현되긴 했다. 라라가 얀코의 손에서 편지를 빼내기 직전까지, 덧없고 무의미한 전쟁 속에 내팽개쳐진 무력감과 절망이 너무도 묵직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라일락 넘버까지만 해도 호감과 애틋함을 가로막고 있던 이성이, Now 에서 터져나온다. 이날 지바고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지바고를 향한 마음을 깨닫는 선녀라라의 감정 또한 설득력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부르조아 이 개새끼들!!" 하며 남편 파샤가 떠난 이후로 줄곧 자신을 완전히 죽여왔던 라라는, 사람을 살리고 지바고와 생각과 마음을 나누며 점차 본래의 제 모습을 꺼내기 시작한다. "지금껏 혼자서도 잘 해왔다" 며 강인하고 주체적으로 제 인생을 향해 떠나려 하지만, '기적' 같은 동일한 경험을 공유한 지바고와 절망까지 함께 겪는다. "지금이야 내일이면 늦어 / 기다릴 수 없어 더 이상은 / 내일은 오지 않을지 몰라" 라고 노래하는 순간 꾹꾹 눌러온 사랑을 더이상 숨기지 못한다. 줄곧 피해오던 지바고의 눈빛을 마주하고 수용하며 끝내 폭발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를 꽉 끌어 안는 순간, 그들 주변에서 터져나오는 감정이 지독하게 짙고 맹렬하여 아름다웠다. 불륜이라 명명될 관계였고, 토냐나 파샤에게 지독히 이기적인 감정과 행동이었으나, 이날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 존재했다는 점을 반드시 감안해야 했다. '세기의' 혹은 '운명적인' 사랑이었다기 보다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막막한 격변의 시대에서 발버둥치던 두 존재가 거짓말 같은 우연을 통해 경험과 아픔을 공유하고 의지하며 꿋꿋이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만든 '기적 같은' 사랑이었다. 그래서 라라와 토냐의 듀엣 넘버가 지난 관극과는 다르게 절절히 공감되고 애틋했다. 단순히 서로를 "그가 선택한 여자" 라고 단정 짓는 게 아니라, 이 혼돈의 러시아에서 상대방의 존재가 어떠한 의미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각각의 감정이 무척이나 강렬하게 다가왔다. 



매번 가족을 먼저 떠올리고 결국 선택하는 지바고의 행동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됐다. 지바고의 유년기는 비극적으로 망가지고 깨진 가족과 외톨이로 남은 그에게 먼저 손 내밀고 받아들여준 따뜻하고 정상적이며 기품있는 가족으로 이루어져있고, 그러므로 그의 인생에서 가족이란 인생을 걸고 지켜내야할 숭고한 대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 하고 울먹이며 토냐에게 말하는 지바고는 개인의 무력감으로 인한 절망으로 휩싸여 있다. 그 순간 나타난 가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유리아틴 역이라는 이름에 흔들림에도 결국 "가족을 위해 어디든 가야" 한다는 결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생각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풀어냈기에 2막의 지바고 역시 설득력을 지니게 됐다. 애써 회피하던 도서관에 들어선 순간 라라를 발견한 류바고는 처음에 흠칫 놀라며 살짝 뒤로 주춤댄다. 잠시 텀을 두고 확연하게 뒷걸음질 친다. 매번 본 디테일이긴 한데, Yurii's Decision 에서 다짐한 대로 도망치려는 마지막 망설임을 표현하기 때문에 엄청 좋아한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다시 돌아봤을 때 그가 없으면 어떡하죠" 라고 중얼거리는 라라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성큼성큼 걸어가는 변화도 무척 설득력 있다. 애쉬즈 넘버 이후 가까스로 빨치산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온 류바고가 토냐의 편지를 읽고 울먹이며 "다 내 잘못이야" 라고 자책하는 애드립도 좋았는데, 2년이 넘거 회피하고 도망친 스스로에 대한 자괴와 절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려야겠다며 하수 쪽 책상 앞에 앉고는 토냐의 편지를 오른손에 꽉 쥐고 있는데, 라라의 노래에 그걸 떨구듯 놓치며 파들거리는 손을 라라의 손을 향해 가져가는 류바고의 감정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프고 강렬했다. 결국 가족은 안전하리라 믿고, 자신을 위해 남아준 라라에게 삶의 마지막을 내어주는 류바고. 도망칠 길을 안내하는 코말롭의 제안에 라라만 보내겠다며 "내가 설득해보겠소" 하며 ↘ 이렇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해는 디테일도 좋아한다. 선녀라라는 같이 출발하지 않는다는 류바고의 말에 화내고 거부하다가 그의 설득에 울망이는 눈으로 '정말 따라올거죠?' 하고 믿어보지만, Now 맆이 시작되는 순간 류바고가 따라오지 않으리란 것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말하는 대로 그를 남겨두고 떠나는 마지막 뒷모습이 너무나 애통했다. 지바고의 무덤 앞에서 죄책감과 그리움과 아픔이 뚝뚝 묻어나는 라라의 표정에서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이날 류바고는 유난히 추워하는 디테일이 많았다. "춥지?" 하고 물으며 샤샤의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 넣는다거나, 오른손으로 왼쪽 팔을 쓸어내린다거나, 애쉬즈 중반에 코트 벗어주고 덜덜 떨리는 입술과 추워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벌벌 떨었다. 러시아의 혹한을 부각시키기 위한 디테일이라서 좋았다. 지난 공연보다 무릎을 유난히 많이 꿇어서 개취로 좋았고, 기도와 성호 긋는 디테일 추가했더라. 2막 초반에 파샤에게 끌려간 장면에서, 파샤가 "이게 당신이 생각한 볼셰비키 혁명입니까?" 하고 대드는 자신의 미간에 정확하게 총구를 들이밀자, 공포와 위압감에 사로 잡혀 묶인 양손을 깍지 낀 채 꽉 마주 쥐고선 마치 기도하듯 입술을 파들거렸다. 파샤 솔로곡 No Mercy at All 넘버 후반부에선 의자에 앉아서 맞잡은 손에 얼굴을 파묻듯 숙인 채 기도를 계속 한다. Ashes and Tears 넘버에서 중간에 "신이여" 하며 성호 긋는 디테일도 생겼다. 애쉬즈 넘버 직전에 제 손으로 목을 그은 포로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총을 쏘는 장면에서, 총구에서 화약 안터져서 무대 상수에서 대신 소리 내줬는데, 리베리우스 은경균 배우가 류바고 손에서 총 뺏어들고 대사 치는 순간 화약 터져서 깜짝 놀랐다. 배우들 큰일 날 뻔 한 일이라 제일 좋아하는 넘버 직전임에도 살짝 집중 흐트러질 정도였다. 총기 안터지는 사고가 몬테 때도 그랬고 종종 있긴 했지만, 이렇게 시간차로 터지면 너무 위험한 것 같다. 소품팀이 더 주의 해줬으면 좋겠다. 이러고 애쉬즈 마지막에 음감이 우당탕 소리 내서 또 아쉬웠고. 다음 관극에선 애쉬즈 넘버가 레전이리라 믿는다ㅠ 



아, 리베리우스랑 대립할 때 류바고가 처음에는 '포로' 라고 자칭하다가, 2년 후에는 '인질' 이라고 바꾸는 대사 왜 그런지 모르겠다. 포로는 전쟁 중에 사로잡은 적이란 뜻이지만, 인질은 대가를 바라고 붙들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거 아닌가? 왜 굳이 다른 단어를 썼는지 이해가 안 되어서 거슬린다. 이런 단어나 어미, 어조를 신경 쓰는 타입이라서 조사 등을 살짝 바꿔서 입에 달라붙게 말하는 미남코마롭이나 선녀라라를 좋아한다. 1막에서 류바고에게 건네는 훈장에 대해 말할 때 영주코마롭은 "자네 아버지한테 황제께서 직접 하사하신" 이라고 말해서 계속 거슬렸는데, 미남코마롭은 "자네 아버지에게 황제께서 직접 하사하신" 이라고 말하더라. 되게 사소한데, 번역투의 어조 싫어해서 계속 거슬렸다ㅠ 이거 말고도 몇 개 있었고. 영주코마롭 목소리도 그렇고 젠틀해서 좋아하긴 하는데, 미남코마롭이 더 유리에게 친근하게 구는 노선이라서 마음에 든다. 미남코마롭은 지바고에게 인간적인 호감이 있다. 2막에서 영주코마롭은 라라만 생각하며 지바고가 끝끝내 동행하지 않겠다는 말에 크게 개의치 않고 라라만 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미남코마롭은 살짝 한숨을 쉬며 이 답답한 놈, 하는 느낌으로 약간의 미련 혹은 안타까움이 있다. 영주코마롭이 오만하고 제 목적만 곧게 추구한다면, 미남코마롭은 능글거리면서도 제 위치나 평판,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고 수긍한다. 그래서 코마롭이 "왜 나를 싫어하는 지는 알지만," 라고 하는 대사의 뉘앙스 차이가 분명하다. 선녀라라도 라일락 넘버 전 전쟁이 끝났다는 기사를 접한 뒤 대사가 간결하고 직관적이어서 좋았다. "군인들이 싸우기를 거부하면 전쟁은 끝이라는 거예요." 하고선 "황제도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하는 미도라라의 대사가 정석인 듯하지만, "~ 거부하면 전쟁은 끝이라는 거예요." 라며 끝을 지우듯 중얼거리고 "황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죠" 하며 이어나가는 선녀라라의 어미가 훨씬 자연스러웠다. 미도라라는 다른 배우와 대사를 주고 받는 장면의 대사톤이 구어체적이고 편안한데,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대사들은 어미가 조금 딱딱해서 아쉬웠다. 이거 말고는 두 배우의 장점이 각각 선명한데다가, 노선의 차이가 명확하여 둘 다 좋다. 이날 선녀라라 When the Music Played 넘버 진짜 너무 좋아서 여기부터 펑펑 울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멋모르고 휘말린 잔혹하고 추악한 현실에서 퍼뜩 주변을 돌아보고선 절박하게 거부하고 도망치려 하는데 끝끝내 붙잡혀 결국 스스로를 책망하며 속으로 썩어들어가는 절망과 절규를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표현했다. 지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이 넘버의 멜로디와 선율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비극이 더욱 배가된다. 우아하고 반짝이는 음악이 마치 비명처럼 온 공간을 휘감는다. 절망을 마주한 순간 터져나오는 감정을 표현하는 이 배우만의 특색이 있는데, 엘리자벳과 몬테크리스토와 모래시계를 거쳐 이번 지바고에서 절정을 찍고 있는 느낌이다. 너무나 아프고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워서 이 감정이 쉬이 씻기지 않는다. 



요정파샤는 늘 잘하는데, 이날 1막에서 유난히 기분이 좋더라. 진짜 취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결혼식 장면에서 한껏 업 되어 있던 파샤가, 2막에 버건디 색감의 눈화장을 하고 나와서 번뜩이는 눈으로 잡아먹을 듯 흉흉하게 사방을 노려보는 흉흉한 눈빛의 지휘관이 된다. 자비란 없다 넘버가 이 극의 모든 넘버를 통틀어 가장 취향에 가까운데, 늘 너무 잘해서 감사하다. 지바고를 풀어주라는 대사 뒤에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오케 강조 조금 더 해도 될 거 같은데 좀 밋밋한 건 아쉽다. 뽕짝 느낌 강한 이번 편곡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살려낼 수 있는 곡이 이 넘버일텐데 그것조차 못해주는 느낌이라 한숨이 난다. 초연을 본 관객들이 이번 재연에서 바뀐 것들 중 가장 속상해 하는 게 2막의 "이거 라라네," 라는 파샤의 대사라고 들었다. 재연에서는 파샤가 결국 잡혀서 사형선고를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초연에서는 끝끝내 라라를 찾아와 지바고와 대화한 뒤 자살했다고 들었다. 시가 다 뭐냐고 비웃던 혁명가가 제가 추구한 혁명에 실패한 이후 지바고의 시를 읽게 되고, 빗 속의 여인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이거 라라네," 라고 말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 추측이 맞다면, 아무리 러닝타임 줄이려 했다해도 이걸 뺸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이 극의 핵심 중 하나 아닌가. 시. 예술. 사랑. 지바고가 추구한 인간의 가치들. 마지막 순간 절정에 달하는 이 감정을 생략해버리니, '시인' 지바고가 극에 남질 않는다. 의사이자 시인인, 지식인 지바고를 퇴색시킨 각색이라고 생각한다. 보지 못한 극에 대해 추측하고 망상하는 걸 좋아하진 않는데, 이 극이 너무 아쉬우니까 초연이 궁금해진다.



앙상블들 참 좋다. 얼굴 구분은 되는데 이름이 안 외워지네. 1열에 앉으니 무대연출이 안보여서 오히려 배우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이게 종합예술에게 건네는 평이어야겠냐고. 주연 배우들이 오중창 하는 넘버가 Love Finds You 맞나. 여기 코말롭이 처음에 노래할 때 라라랑 지바고 등돌리고 서있는 와중에 스크린 배경 진짜 혼돈의 도가니다. 세상에, 그런 색감은 대체 누가 만든 거야. 세 개의 스크린이 오르락 내리락 할 때 서로 정확히 수평 들어맞지 못하고 약간씩 조정하는 건 이제 짜증내기도 질렸다ㅋ 그냥 그 사이를 안쳐다보는 걸로 자체 타협했다. 홈쇼핑에서 산 예매권도 있고, 막공도 가야 하고, 그 와중에 그래에서 좋은 자리 잡고, 이래서 몇 번은 더 볼 것 같다. 류배우님 차기작이 나와야 미련 없이 이 극을 조금만 볼 텐데. 다음 관극 역시 배우들이 감동시켜 주리라 믿으며, 자셋 관극 리뷰를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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