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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in 샤롯데씨어터, 2018.03.08 8시 공연





류정한 지바고, 전미도 라라, 서영주 코마로프스키. 류바고, 미도라라, 영주코마롭. 류바고 자둘. 



※극도의 불호, 몹시 주관적인 견해, 약스포※



입덕 이후 최대의 난관에 부딪혔다. 류배우님 아니었으면 자첫자막 했을 극을, 자둘하고도 또 몇 번을 더 볼 예정이라니 막막하다. 이 극이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도저히 모르겠다. 지바고와 라라의 애절하고 운명적인 사랑? 격변하는 시대의 풍파를 고스란히 마주하며 휩쓸리는, 나약한 개인이자 유약한 지식인인 지바고의 인생? 그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초라하지만 삶의 일면들? 사랑 이야기가 하고 싶었으면 지바고와 라라가 서로를 향해 쌓아나가는 감정선에 더 집중했어야 했고, 지바고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면 그가 처한 시대와 상황을 더 자세히 풀어냈어야 했다. 각자의 이야기를 지닌 캐릭터들이 각기 단편적인 장면들 안에서만 존재하여 극의 큰 흐름이 하나로 이어지지 못한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촘촘하게 역사가 누적되어야 하는데, 오직 각자의 길 위에만 서서 헤매고 저마다의 감정만을 노래한다. 유의미한 접점이 부재한 상황에서 관계성을 통해 생성되는 '주제' 가 드러날 리 없다. 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모호하니 이야기의 개연성이 생길 리 만무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감정선이 표현되기 어렵다.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애매하니 설명이 빈약하고 사건의 전개가 널을 뛰며 산만하게 흩뿌려져 있다. 스토리가 부족하면 연출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무대도 오케도 조명도 죄다 단조롭고 궁핍하기 그지없다. 1막을 보며 극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장면들의 재배치와 대사의 변경 등을 잔뜩 생각하다가, 2막에서는 그냥 다 포기해버렸다. 수정이 아니라 재창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단순히 지루한 게 아니라 몹시 지겹다. 재미라도 있으면 자발적으로 구멍을 메꾸며 아득바득 이야기를 꿰어맞춰볼텐데, 그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배우가 여러가지 노선 변경 등의 시도를 하며 극을 끌어나간다 하더라도, 이 연출 상에서는 극 자체의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하여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리라고 본다. 이 조악한 무대 위에서 매일매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기할 배우들임을 알기에, 화가 난다. 극을 못 만들 수도 있지만, 그 수준이 정도껏이어야지. 





2층에서 관극하며 발견한 조명 연출 하나만 딱 얘기하고 끝내야겠다. 유리아틴에 도착하고 계속 회피하고 숨던 지바고가 토냐의 지지에 떠밀려 집을 나서고 무대 안쪽을 향해 등을 돌린다. 무대 안쪽에는 지바고의 시집을 들고 객석을 향해 서 있는 라라가 있다. 두 사람의 발 아래에는 마치 길 같아 보이는 직사각형 모양의 조명이 세로로 비춰지고, 그들의 걸음에 맞춰 움직인다. 그리고 라라의 솔로곡 끝 무렵 도서관 안으로 들어온 지바고의 아래 그 조명이 가로로 비춰진다.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그 조명이 무대 중앙에 서있는 라라의 발 아래에도 있다. 여기서 지바고가 뛰어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라라의 조명과 마주쳤어야 더 극적이었을 텐데, 지바고 발 아래에 있던 조명이 옅어진 뒤 두 사람이 포옹하는 순간 라라의 발 아래 있던 조명이 보다 밝아진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듀엣 부르는데 라라의 동료가 우연히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 분명 있는데 그 배우에게 조명을 안 비춰서 2층에선 등장했다는 것 자체도 식별이 불가능했다. 이외에도 조명 색감들이 전반적으로 흐릿한데다가, 강조가 필요한 지점들에서 제대로 무대를 비추지 못하더라. 지바고가 빨치산에게서 도망칠 때도 '도망자' 를 구분할 수 있도록 조명 연출을 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 어둡고 지나치게 단색이어서 팽팽한 긴장감이 필요한 장면이 밋밋했다. 샤롯데에서 조명을 이따위로 밖에 활용을 못한다니, 조명 덕후로서 진짜 울고 싶다. 샤롯데에 올라온 오디극인 스위니토드나 타이타닉 조명은 엄청 좋았는데, 지바고는 왜때문에 이러는 거죠. 조명연출은 극적인 상황을 강조하거나 화려하고 인상적인 무대를 만들어내는 역할 이외에도, 다양한 효과를 창조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전 장면에서 보여준 비슷한 모양이나 색깔, 반짝임 등의 효과를 그 이후 장면에서 적절한 시점에 반복하면서 연상효과를 통해 장면과 장면을 이어줄 수 있다. 넘버로 따지자면 리프라이즈 처럼 말이다. 이외에도 진부하지만 매번 성공하는 클리셰한 연출이나 다양한 작품에서 만나본 여러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연출의 사례들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이렇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조명연출마저 지대한 실망을 안겨주니, 이 극을 즐길만한 여지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음악이 훌륭하거나, 조명이 아름답거나, 무대가 눈부시거나, 이야기가 재미있거나. 뭐라도 해줘야 관객이 시간을 내고 돈을 들여 공연을 보러 가죠. 내가 아무리 류배우님을 사랑하고 아낀다고 해도, 극을 통해 뭔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단 하나라도 있어야 기쁜 마음으로 공연장에 갈 수 있단 말이다. 관극을 결정함에 있어 배우를 몹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후임에도 불구하고, 애정배우 가득한 이 극이 도저히 안되겠다. 단순히 재미가 없거나 별로였다면 그냥 불호 리뷰 터트리고 볼멘소리 하고 넘겼을텐데, 이건 뭐 아마데우스 덕에 행복하던 덕심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은 격이라서 진정이 안된다. 아, 지금 이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게 작년에 뮤지컬 인터뷰 보고 난 직후구나. 불호의 지점은 다소 다르지만, 공연이라는 장르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만든 관극이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즐겁자고 하는 덕질인데, 심지어 류배우님이 그토록 잘생기고 우아하고 청년미 넘치는 목소리로 노래하는데, 왜 이렇게 승질을 부리도록 만드는 걸까. "찬란하고 위대한 감동의 대서사시" 라는 문구를 맨 위에 내세울 거면, 저 네 개의 포인트 중에 적어도 하나는 보여줘야 할 것 아니냐고. 찬란한 무대도 아니고 위대한 이야기도 아니며 감동적인 사랑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바고라는 인물의 일생을 따라갔을 뿐 대서사시가 응당 보여줘야 할 이야기 구조와 극의 전개가 전혀 없다. 하아. 쓸수록 짜증나고 열이 받아서 그만 줄여야겠다. 차라리 취향이 아닌 수준의 불호였다면 취향을 바꿔서라도 회전을 돌았을텐데. '류정한' 석 자가 취향인 덕후임에도 불구하고, 힘겹다. 그래도 류배우님의 목소리와 노래와 연기와 그냥 존재 자체를 애정하고 사랑하는 팬이니까, 몇 번 더 보러 가겠습니다. 이렇게 혼자 난리 치며 불호를 부르짖고서는 자셋 관극에서 화해하는, 그런 기적 같고 극적인 타협점을 찾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네요. 부디 차기작은 제 취향인 극이길 개막 한 주밖에 안된 지금부터 간절히 바라면서, 이달 말쯤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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