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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스

in 광림BBCH홀, 2018.03.07 8시 공연





한지상 살리에리, 조정석 아마데우스, 함연지 콘스탄체, 박영수 요제프. 핝살리, 뽀아마데. 핝뽀 페어 자첫, 아마데 자둘.



큰일났다. 자첫보다 더 재미있다. 본공은 프리뷰와 비교하여 일부 대사들을 쳐내고 보다 간결해졌다. 자첫 리뷰에서 기울임체라 비유했던 핝살리의 대사속도가 다소 반듯해졌다. op 1열 중앙 부근에 앉아 코앞에서 마주한 배우들의 얼굴에, 순간 순간의 변화에 맞게 바뀌는 온갖 감정들이 화려하게 꽃 피웠다. 자첫 때 놓쳤던 찰나의 표정들이 재미있었고, 놀라웠고, 비극적이었다. 다만 무대가 너무 크다. 무대 폭과 높이가 딱 2/3 정도였으면 훨씬 쫀쫀하고 긴박한 연극이 됐을 것 같아서 아쉽다. 앙상블들의 군무나 움직임, 극 속 오페라 장면들을 살짝 뒤쪽에서 전체적으로 한 번 보고, 가까이에서 배우들 얼굴 위주로 관극을 하니 정말 좋았다. 자첫에서 놓쳤던 흐름이 보다 명확해졌고 그래서 몰입이 잘 되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스포 있음※



아마데우스 역의 배우만 바뀐 자둘 관극이었는데, 핝뽀 페어가 기대했던 대로 그림체도 비슷하고 배우 간 합이 좋긴 하더라. 다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김재욱 배우의 노선이 조정석 배우의 노선보다 약간 더 마음에 들었다. 뽀아마데는 첫만남부터 살리에리를 경계하고 싫어하며 적대심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살리에리가 만든 행진곡을 외워서 치면서 보란듯이 살리에리를 향해 이게 훨씬 낫지 않냐며 대놓고 비웃으며, 후반부에서는 경멸의 기색까지도 띄운다. 반면 재욱아마데가 행진곡을 칠 때는 범재를 향한 천재의 악의 없는 조롱이 보였다. 살리에리를 좋아하거나 신용하진 않지만, 그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보다는 그가 만든 작품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재욱아마데가 재능이 없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뽀아마데는 그 애매한 재능을 가진 범재 혹은 수재의 존재를 인지하되 납득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뽀아마데가 좀 더 어리게 보이고, 더 무례해 보이고, 광기가 더 돋보이는 천재로 보인다. 이러한 노선 차이가 극의 클라이막스인 레퀴엠 장면에서 살리에리와 맞부딪히는 날선 감정 대립을 사뭇 다른 색감으로 만들어 버렸다. 두 노선이 명확하게 다르기에 회전 도는 관객 입장에서는 무척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욱아마데가 표현하는 '미친놈' 이 극의 컨셉이나 연출, 의상 등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비엔나 쇤브룬 궁에서 일하는 '궁정' 어쩌고 직함을 단 역할의 배우들은 18세기 시대에 맞는 의상을 갖춰 입었다. 하지만 살리에리 주변을 맴도는 작은 바람들은 부조화를 이루는 형광색들을 각기 포인트로 넣은 의상을 입어 시대를 초월하여 색다르고 판타지적인 극의 요소로 존재한다. 그 독특함은 독보적인 독창성을 지닌 아마데우스의 의상에서 정점을 이룬다. 새하얀 머리와 새하얀 얼굴에 새햐얀 상하의를 입고, 무려 형광색의 양말과 형광색의 하이탑 스니커즈를 신은 그 화려하고 눈부신 존재감. 보수적이고,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신과 영웅만을 좇으며 정체되어 있는 시대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이 천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디자인은 당시 시대상을 따르되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개성을 숨김 없이 보여주는 의상 연출이다. 이 '개성'이 다소 현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색감과 소품이기에, 현실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재능만큼은 지나치게 앞섰기에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 로 보이는 재욱아마데의 노선이 이 연출을 더 확실히 이해하게 만들었다. 뽀아마데는 허공에 홀로 떠있는 듯한, 범접할 수조차 없는 천재여서 굳이 그러한 의상포인트가 필요 없어 보였다. 그냥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고고히 떠있는 존재였기에 처음부터 계속 올화이트로 입었어도 노선에 잘 맞았으리라 주관적으로 생각해봤다. 물론 두 배우 모두 연기가 너무 좋고 설득력이 뛰어나기에, 노선 다른 맛에 번갈아가며 볼 예정이다. 



자둘을 하기 전에 영화 아마데우스를 봤다. 명작이라는 명성만 익히 들어왔는데, 연출과 구성이 가히 걸작이라 불릴만 하더라. 초중반 장면 전환 연출이나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들어가는 음악 연출에 몇 번이나 감탄을 했다. 이야기 전개가 연극과는 꽤 달랐으나, 연극과 영화 모두 각자의 장르에 적합한 양식으로 적절하게 풀어났다. 이야기의 근간에 있는 주제를 놓고, 영화와 연극이 각자 다른 지점에 방점을 두고 결말을 이끌어낸 점이 가장 큰 차이였다. 오명이든 악명이든 대중들에게 '기억되는' 이름으로 남고 싶은 욕망, 마지막만큼은 결코 신의 뜻대로 되도록 하지 않겠노라 악착같이 저항하고 뿌리치는 절박한 오만, 계획한 복수가 황망하게 무너져버린 절망, 마침내 스스로 내리는 자기자신을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 을 향한 용서. 이러한 복잡하고 치밀하고 잘 짜여진 살리에리의 마지막을 아주 극적으로 연출해낸 연극의 결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자첫 때는 자살하기 직전 살리에리의 대사들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자살이 실패로 돌아가며 이슈가 아니라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살리에리가 느끼는 모욕과 좌절, 비참함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게 다가와서 살짝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자첫 때는 살리에리의 대사처럼, 흙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안토니오 살리에리' 라는, '평범함의 수호자' 의 이름을 불러야겠다고 문득 생각했을 만큼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살리에리의 감정에 몰입이 됐었다. 자둘에서는 나락으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인간' 살리에리의 마지막 기도와 목소리에 애틋함과 공감과 동정을 느꼈다. 레퀴엠에서 아마데우스에게 쏟아내는 대사들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순간이 오면, 살리에리의 대사들에 위로를 받게 될 것 같다. 평범함에 절망하고 스스로의 재능에 실망하며 악착같이 삶을 살아내는 수많은 '살리에리' 들이 존재하기에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물론 살리에리는 악역이다. 불쌍하지만, 비틀린 분노로 악의에 찬 일들을 자행하는 나쁜 놈이다. 신을 향해 "당신은 나의 영원한 적입니다. 영원한 적!" 이라고 선언했으면서, 신이 아니라 신이 선택한 다른 인간을 괴롭히고 바닥으로 끌어내려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 왜 그를 동정하여 자비를 베풀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선수쳐서 던지고, 당위성을 내세운 자기변명을 내놓는다. 신이 나에게 자비를 보여주지 않았기에 자신 역시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모차르트가 고통 받는 건 다름 아닌 신 당신 때문이라고. 그러나 그 괴롭힘은 결국 살리에리 스스로를 곪고 썩게 했고, 그것이 그를 마냥 저주하고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성심과 근면, 금욕을 추구하며 고결하게 살아온 살리에리가 자신의 기도와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신을 향해 분노하고 맞서 싸운다. 아마데우스를 괴롭히고 있지만, 신을 저주하고 반발한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자책하고 절망하는 아마데우스의 뒤로 천천히 다가가면서 핝살리는 검지를 들어 객석을 향해 쉿, 하는 모션을 취한다. "나에게 기대, 나에게, 기대" 라고 속삭이듯 일견 다정한듯 말하는 입술은 아마데우스를 향하고 있지만 형형하게 이글거리는 눈빛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늘을, 신만을 노려보고 있다. 살리에리는 아마데우스를 '인간' 이라기보다는 '신의 도구' 로 보고 있기에 죄책감이나 미안함 없이 계략과 음모를 짜서 그를 구석으로 매몰차게 몰아넣었다. 그러다가 레퀴엠 장면에서 자신을 미워하는 줄 알았다며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아마데우스의 사과를 듣는 순간 살리에리는 지금껏 제 앞에 있던 존재가 누구인지 깨닫는다.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아마데우스가 진혼곡을 완성하고 죽으면 그 곡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공표하며 아마데우스의 장례식에서 그 곡을 연주하겠다는 잔인한 음모를 꾸몄다. 반면 연극에서는 진혼미사곡 작곡이 아마데우스를 사지로 내몰 것이라 판단한 살리에리가 그에게 작곡을 의뢰한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연극에서는 살리에리가 '누구를 위한' 진혼곡인지 의문을 지닌다. 모차르트를 위한 것일리가 없지, 그의 음악은 영원히 존재하니까, 영원히 살아 있는 것에 진혼곡은 필요없어, 라고 말하던 살리에리는 아마데우스의 사과에 그제야 깨닫는다. 이건 자신의, 타락하고 더러워진 영혼을 위한 진혼곡이라는 것을. 그래서 살리에리는 '용서' 라는 단어를 꺼내어 용서를 빈다. 강요한다. 이 장면은 다음 관극 후에 더 풀어볼 생각이다. 그렇게 살리에리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그의 음악으로 영원히 존재하리란 것을 알기에 스스로도 '영원불멸의 존재' 가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고자 한다. 영원불멸의 음악을 만든 이를 죽인 살인자로서, 그 음악이 존재하고 찬양 받는 한 그 역시 존재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영리하고 처절하고 절박하여 추해보이는 이 발악이, 살리에리를 '인간' 으로 남긴다. 그 악랄함을 미워하고 증오하되, 그 자괴와 열등감을 부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보통 천재와 범재를 내세운 이야기는 인간이 인간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여 파멸로 치닫는데, 이 극은 인간이 인간으로 인해 절망하지만 그가 아닌 신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부인한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영화에서는 대중의 지지와 인정과 찬사를 받고, 부귀와 명예와 지위를 지니고 일생을 풍족하게 살았음에도 오로지 신의 뜻을, 능력을, 재능을, 음악을 지닌 단 한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해 만족하지 못하고 평생 열패감에 시달린 살리에리의 모습 또한 부각이 됐다. 그러나 연극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 때문인지 자신의 작품을 내놓고 아마데우스의 인정을 바라는 살리에리의 패배감은 삭제했다. 대신 '신' 에 대한 반발심을 더 부각시키며 영화와는 미묘하게 다른 지점에 초점을 맞췄다. 아마데우스의 작품에 경이를 느끼고 감탄하고 온갖 감정에 몸을 내던지며 감상하는 살리에리의 감정은 영화와 연극 모두 잘 담아냈다.  



배우들 디테일이나 연출 등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은데, 글이 더욱 난잡해질 것 같으니 다음 후기로 미뤄본다. 역시 관극은 이렇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감탄하며 즐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 공연을 보러가면서는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행복하고, 공연 중에는 마음껏 몰입하며 즐거워하고, 공연을 보고 나온 이후에는 여운을 느끼고 극을 곱씹으며 충만한 기분을 느끼는, 이러한 관극이 있기에 연뮤덕질을 한다. 담주 앞자리 표를 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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