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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엘지아트센터, 2017.07.22 2시 공연
류정한 시라노, 최현주 록산, 서경수 크리스티앙, 이창용 드기슈, 김대종 르브레. 류라노, 블리록산, 경티앙, 용기슈, 대종르브레. 류블리경게. 류라노 자둘, 시라노 자셋.
※스포있음※
01. 공연을 시작해 (Let The Play Begin)
시라노 배우들이 얼마나 노래에 강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극을 여는 첫 넘버. 눈에 익은 배우들 얼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첫 곡이라서 큰 애드립 없이 매번 비슷하게 가는데도 늘 즐거운 넘버.
02. 나의 코 (My Nose)
th발음 심한 몽플뢰리의 공연 중간에 난입하는 한 목소리. "아니, 안 망쳤는데?" 하는 몽플뢰리 말을 우스꽝스럽게 따라하며 몸까지 흔드는 류라노 뒷모습에 빵 터졌다ㅋㅋㅋㅋㅋ "하나," 하고 바로 "둘, 셋" 박수 치며 몽플뢰리를 쫒아내는 류라노. 그에게 쏟아지는 항의에 처음으로 객석을 향해 큰 코를 보여준다. 장난스러운 듯, 비아냥 거리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따박따박 이상하게 생긴 제 코를 비유하고 묘사하는 류라노의 언어가 흘러 넘친다. 뎅라노는 까불거리면서 제 단점을 유쾌하게 웃음으로 승화하며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류라노는 우아하고 고고하게 제 단점을 스스로 내보이며 오히려 상대와의 우위관계를 반전시킨다. 류라노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무척 풍성하고, 테이블 위에서 큰 코 "덕분에 다른 곳까지 차원이 다르지" 하면서 허리 튕기는 디테일도 늘 사랑한다ㅋㅋ
03. 터치 (Touch)
우아하게 빈정대며 인사하는 류라노. 발베르와 결투하기 전에 칼로 시를 쓴다고 하나? 암튼 그러면서 빨간 옷 입은 여앙 옆에서 매번 뭔갈 하는데, 이날 그 배우가 비명을 지르니까 류라노가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ㅋㅋㅋㅋㅋ 그거에 여앙이 현웃 빵 터져서 숄로 얼굴 가리고 웃었다ㅋㅋㅋ 플뷰 때는 칼싸움 합이 그래도 맞았던 거 같은데 이날은 챙챙거리는 소리 안난 게 몇 번 있었다ㅋㅋㅋ 중블에 앉았더니 오른쪽 무대 구조물 2층에서 이 결투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 경티앙이 잘 보였다. 그나저나 이 극에 대사와 가사가 좀 과하다시피 많다는 게 새삼 류배우님 목소리를 들으니 실감이 났다. 다른 극에서 류배우님이 연기하던 캐릭터가 말하는 속도와, 류라노가 말하는 속도가 다르다. 워낙 딕션이 좋으니 알아듣는데 큰 문제는 없지만, "심심한 난 그대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하는 식의 말장난이나 운율 같은 걸 관객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작은 걱정이 관극마다 든다. 시라노 배우들이 런닝타임에 대한 부담을 매 공연마다 안고 갈 것 같다.
04. 록산 (Roxane)
라그노네 빵집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왜 장소가 들을 때마다 바뀌는 것 같은가. 나가는 록산네 가정교사 등에 대고 "기다릴게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다. 류배우님과 대종배우가 친구로 나오는 걸 드디어 봤는데, 정말 친한 친구 같이 합이 잘 맞더라ㅎㅎ 앞 두 곡과 다르게 떨리는 감정 가득한 목소리로 부르는 헌사. 시라노 초반 곡들에서 목소리에 강약 조절을 상당히 많이 하면서 부르는 류배우님이라서 귀가 매번 황홀하다.
05. 거인을 데려와 (Bring Me Giants)
리니에르로 나오는 정성진 배우 좋다ㅎ 노래도 잘 하시고 술 주정뱅이의 과장스런 연기도 찰지다. "살다보면 타혐도 하고 산다는" 대종르브레의 말이 비굴하지만 현실적이어서 벌써부터 아프기 시작하고, 그런 친구들을 향해 웃음을 터뜨리는 류라노. "구걸하듯 살텐가" 즈음부터 "거인과 맞서리라" 까지 가성으로 부르시는데, 극적 긴장감과 떨리는 느낌이 아주 생생하게 표현된다. 무대 위로 올라간 류라노 뒤로 무대 배경이 올라가고 뒤쪽 철골? 모양의 도심이 배경으로 쭉 펼쳐진다. 강렬한 색으로 변화하는 배경색과 류라노의 목소리가 동시에 눈과 귀에 충격을 가한다. 매번 오블에서 보다가 중블, 그것도 정중앙에서 보니까 뒷배경과 조명을 연출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다뤘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06. 패스트리와 시 (Pastry and Poetry)
기홍라그노 멋져요!!! 꺄아!!! 지난번에 뎅옵이랑 라디오 나와서 빵을 안 먹는다는 걸 밝히셔서 빵 안 먹는 빵집주인(...) 이미지가 내 안에 생겨버렸지만, 그거와 별개로 움직이고 애드립하면서도 노래가 전혀 흔들리지 않고 개그포인트도 찰지게 잘 살리는 멋진 배우다. 다리 다쳤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이날 테이블에서 확 점프에서 조금 걱정됐다. 어서 완쾌하세요ㅠㅠ
07. 벨쥐락의 여름 (Summer Time In Bergerac)
류라노 플뷰도 그렇고 지난번 뎅라노도 그렇고 접시 자주 엎더니, 아예 낮은 접시로 바꿔버렸더라ㅋㅋㅋ 만나줘서 고맙다는 록산의 말에 "당신이 부른다면 죽음의 신이 찾아와도 뿌리치고 오겠다"고 말하는 시라노. 2막에서 이 말을 정말 지켜낸 그를 알기에 그저 지나칠 수 없는 대사다. 이 넘버는 정말 추억을 되짚는 느낌이 나는 듯한 아련함이 있다. 프리뷰 공연과 비교하여 류라노와 블리록산의 화음이 더 좋아졌다. 왜 다들 류블리를 앓았던 건지 깨달았어ㅠㅠ
08. 누군가 (Someone)
고백할 게 있다는 록산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벌써 고백을..?" 하는 류라노의 노선이 프리뷰 때와 너무 달랐다ㅋㅋㅋㅋ 소심하고 안으로 땅굴 파는 느낌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착각해버린다. 록산의 말에 중간중간 "아,"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 가며 꿈인 듯 현실인 듯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훌륭한 청자였다. 칭찬의 말에 "아유, 그 정돈 아닌데," 하기도 하지만, "얼굴도 잘생긴" 이라는 말에 비로소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시간이 정지한 듯 천천히 현실로 깨어난다. "그 특별한 사람은 바로," 하는 말에 손을 뻗으며 긴장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다 제 이름이 아닌 단어가 그 입에서 나오자 얼굴 가득 찌푸린 듯 울상인 듯 기묘해진 표정을 띄우며 "아아," 하고 가슴 시린 탄식을 뱉어낸다. 일부러 조금 과장스럽게 태도와 표정을 취해서 객석의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그 속이 어떨지 짐작이 가서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회전 돌 수록, 남들 터지는 장면에서 절대 못 웃음ㅠㅠ 크리스티앙이 이상한 사람이라면 "죽어버릴거예요" 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록산의 모습에 "오 완전히 빠져버렸잖아," 하면서 그를 끌어다가 의자에 앉히는 류라노의 행동이 오빠 같기도 보호자 같기도 했다.
09. 가스콘 용병대 (The Gascons)
누가!!! 시라노에!!!! 킬링넘버가 없다고 했죠!!?!?!?!?!?! 자둘부터 관극 후에 이 넘버가 계속 맴돈다. 해외 버젼 오슷을 일부러 안 듣고 있는데, 이 넘버만큼은 주구장창 반복했다. 군무도 좋고 넘버도 신나고. 대극장 특유의 떼창, 무척 사랑합니다. 이 넘버에서 르브레는 같이 노래 안하고 하수 쪽에 서서 호응 좀 하고 드기슈 눈치 보고 그러는 건 좀 아쉽다. 이 전 씬에서 블리록산이 류라노 손의 붕대를 제대로 꽉 감아주지 않았는지 붕대가 계속 풀리더라. 뒤쪽 테이블 위에 서서 지휘하듯 칼을 휘두르는 류라노의 소매가 가뜩이나 긴데 오른손 붕대가 자꾸 흘러내려서 시선을 빼앗았다ㅋㅋ
10. 완벽한 연인 (The Perfect Lover)
경티앙 코그로 지난 번보다 능숙해졌다. 파들파들 거리며 "오늘이 의가사하는 날이겠군!!!" 하는 류라노 너무 귀여움ㅠㅠ "대인배!대인배!" 하면서 상황 무마하며 넘어가는 것도 하찮아서(...) 사랑한다ㅋㅋㅋㅋ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하며 "다 나가!!" 하며 사람들을 쫒아내는데, 칼로 테이블 치다가 테이블 나가니까 하수 쪽 무대구조물 난간을 챙챙 때려서 빵 터졌다. 록산의 오빠라는 류라노의 소개에 황급히 좀 전의 무례를 사과하는 경티앙. "미소로?" 하는 경티앙의 빙구 같은 말에 인상 확 찌푸리며 한심해하는 류라노. 이 쪽은 나이 터울 크게 나는 큰 형 같은 느낌이었다. 빙티앙한테는 꽤 웃어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프리뷰니까 본공에서 좀 달라진 걸 수도 있다.
11. 당신이란 여자 (Who But A Woman)
벌써 록산네 발코니 씬. "너무 아름다워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하며 편지를 가슴에 끌어 안는 블리록산. 그를 찾아온 용기슈. 용기슈 노래가 너무 적어서 아쉬울 정돈데, 그 귀여운 외모로 비열하고 탐욕 넘치는 눈빛과 목소리로 부르는 솔로 넘버다.
12. 만약 내가 말할 수 있다면 (If I Only Had The Words)
"다른 사람이 연애하는 것 같다"며 시라노의 도움을 거절한 경티앙. 여기 웃음포인트 엄청 잘 살리는데, 저기, 음, 엄청, 당신의 주둥이에, 아니아니 당신의 목구녕에, 하는 이 괴상망측한 단어의 나열을 어리숙하게 적절한 타이밍으로 잘 넘긴다ㅋㅋ 그리고 크리스티앙 솔로곡. 목소리 시원시원하니 좋다. 하고 싶은 말은 넘치지만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 그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는 슬픔이 느껴진다. 여기서 록산의 태도도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이 장면에서 록산이 크리스티앙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편협하다. 잘생긴 외모, 아름답고 훌륭한 단어와 문장을 쏟아내는 그의 편지, 오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들으며 그것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실망하고 화내고 돌아서버리는 건 '사랑' 이 아니지. 상대의 능력과 외모를 찬양하지만, 그 이외의 현실적이고 실망스런 모습은 외면하거나 비난하는 일방적 감정은 결코 사랑이라 불릴 수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면 덕질을 해야지. 아직까지는 어린 아이 같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감정 뿐인 록산은, 다음 장면으로 인해 변화한다.
13. 마침내 사랑이 (Love Is Here At Last)
돌아온 시라노. 발코니 아래에서 손짓발짓하며 할 말을 일러주지만, 답답함에 결국 모자를 바꿔 쓰고 경티앙의 겉옷을 위에 걸친 뒤 달 아래 뒤돌아 선 류라노. 약간 비대칭으로 잘못 입혀줬다. 모습을 숨긴 채 당신과 이야기하게 해달라는 류라노. "당신은 빛 속에, 난 어둠 속에, 그게 우리에게 어울려요," 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려와서 내 심장도 같이 떨려왔다. 진정한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온 거라면 어떤 말을 들려주겠냐는 록산의 물음에 시작되는 넘버. "나의 천사 / 나의 꿈 / 내 영혼의 숨결 같은 그대여" 하고 시작되는 이 아름답고 눈부신 노래. "그대 미소가 날 살게해요" 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소중한 무언가를 다루듯 섬세하고 반짝거려서 가슴이 설렜다. 이어가는 블리록산의 노래 중 "숨쉬는 공기마저 달라졌어" 하는 가사도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아름답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로 말하는 사랑의 문장을 두 귀로 듣게 된 록산의 감정은, 더 이상 이전의 그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다. "난 다시 태어난 거야 / 내게 와준 사랑" 이라고 노래하며 온 마음으로 상대를 끌어안고 사랑하게 된 록산. 이야기의 비극은 그 목소리가 크리스티앙의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록산의 그 사랑마저 크리스티앙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 오해와 거짓이 모두를 암흑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록산이 노래하는 동안 다시 옷을 바꿔 입은 두 사람. 달빛 아래에서 록산과 시선을 교환한 크리스티앙은 2층으로 뛰어 올라가지만, 시라노는 여전히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환한 달빛 아래로 뛰쳐 나가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건 키스하는 두 사람이다.
13-a. 그의 입술에 닿는 나의 이야기 (My Words Upon His Lips)
절망스런 얼굴. "패배뿐인 승리" 라거나 "공허한 축배", "잔인한 영광" 같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 제가 만든 결실을 바라보는 허망하고 허탈한 시라노의 감정을 여실히 표현한다. "내 말을 품은 입술에 / 나의 그녀가 입맞출 때" 하는 마지막 가사의 여운이 짙고 어둡고 아프다.
13-b. 드기슈의 편지 (De Guiche's Letter)
왼쪽 구조물 위에서 노래하는 용기슈. 음정 꽤 높은데 엄청 유려하게 소화한다. 긴장감과 박진감, 단호함이 다 들어있는 넘버. 그리고 그 내용을 완전히 바꿔서 불러버리는 록산.
14. 달에서 떨어진 나 (I Fell From The Moon)
삐리빠라뽕, 하나로 정리되는 넘버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구조물에 매달려 있는 모습부터 귀여움 대폭발인데, 목소리까지 너무 귀엽고ㅠㅠㅠㅠㅠㅠㅠ 아 진짜 미친다, 이 넘버ㅋㅋㅋㅋㅋㅋㅋ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ㅋㅋㅋㅋㅋㅋ 그 칼딕션으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노래하는 목소리에 새삼 심쿵사 하는데, 이런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라서 너무 좋다ㅋㅋㅋㅋㅋㅋㅋㅋ 앙상블 떼창하는데 뒤 벤치에 서서 "아오~" 라거나 "아르rrrrr" 하는 추임새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놀러와라" 하는 것도 장난기 넘치고ㅋㅋㅋㅋㅋ 류배우님, 늘 말씀드리지만 정말 사랑합니다ㅠㅠb 노래 다 해놓고 동료들한테, 그래 수고했어, 하고 멀쩡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 갭까지 전부 아낀다ㅠㅠ 10분이 지난 뒤 등장하는 두 사람의 '혼인서약'이 끝났다고 해야 하는데 이날 '혼인신고'라고 해서 내적 당황했다ㅋㅋ
15. 그를 부탁해요 (Take Care Of Him)
하지만, 록산의 꼼수는 극단적 비극으로 치닫는다. 아름답고 젊은 부부를 마주한 용기슈는 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가스콘 부대에 징집명령을 내린다. 애달프게 헤어지는 크리스티앙과 록산. 그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는 시라노. 그런 그에게 매달리며 부디 크리스티앙을 지켜 달라며, 그의 "방패가 되어달라" 고 말하는 잔인한 록산.
16. 나 홀로 (Alone)
1막 마지막 넘버는 가장 극적이고 임팩트 있어야 하고, 이 넘버는 훌륭히 그 역할을 다한다. 모자를 벗고 강하게 왼쪽으로 내팽개치는 류라노. "왜 신은 내게만 언제나 지독하고 가혹한 웃음을 짓는가" 하며 강렬하게 시작되는 노래. 절절하게 가슴을 쥐어뜯는 절규 같이 "아프고 아프고 아파도," 하며 울먹이다가 점차 마음을 다잡는다. "승리도 패배도 늘 내 몫이니" 하며 "기꺼이 맞서리라, 홀로" 라 말한다. "날 할퀴는 사랑도 / 전쟁과 운명도 / 난 두렵지 않아 / 이대로 난 앞으로 / 나아가리 나아가리 / 홀로" 하며 웅장하고 장엄하게 마무리 짓는 목소리. 커다랗게 내려온 달을 배경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며 자세를 마무리하여 아주 멋진 실루엣이 잔상처럼 남는다.
17. 파리의 추억 (Memories Of Paris)
2막 첫 곡. 익숙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연출이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레미제라블 느낌을 내려 했으나 관객 입장에선 오히려 아리랑이 떠오른달까. 저 두 작품을 비교하려는 게 아니라, 이 극 시라노의 시대적 배경에 어울리느냐 아니냐를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파리를 그리워하는데 파리가 연상되지 않는 건 연출 상의 문제니까. 그럼에도 자둘, 자셋을 거치면서 객관성을 상실했기에 자첫의 그 미묘한 불편함과 불호요인이 많이 옅어졌다ㅠㅠ 자첫 때 후기를 길고 상세하게 날 것으로 남겨놨어야 하는 건데.
17-a. 드기슈의 스카프 (De Guiche's Scarf)
포탄을 뚫고 '매일매일' 편지를 부치러 갈 정도면, 음식 정도도 구해올 수 있는 거 아닐까? 하는 뻘한 의문은 제쳐두자. 전투 도중 꽁무니를 뺀 드기슈에게 비아냥 거리며 스카프를 흔들어 대는 시라노.
17-b. 크리스티앙의 이별편지 (Christian's Letter Of Farewell)
오로지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험한 전쟁터를 뚫고 지나온 록산. 당차고 꼿꼿하며 의지가 넘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록산이 가장 먼저 발견하여 이름을 부르고 껴안은 사람은 시라노였다. 그 다음이 크리스티앙. 환한 얼굴의 그를 붙들고, 자신이 생각보다 편지를 자주 썼다고 고백한다. '매일 매일' 말이다. "내가," 하고 말을 꺼내고, "아니, 자네가," 하면서 정정하는 류라노의 어투가 친절하고 다정해서 더 아프다. 블리록산과 경티앙은 연상연하 커플 같고 류라노는 그보다 조금 더 나잇대가 위면서 너그럽게 보듬는 듯한 위치라서, 류라노가 두 사람에게 선을 긋는 거리감이 더 확 느껴진다.
18. 영광을 향해 (Forward To Glory)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승리의 향기에 취한 겁니다!" 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류라노. 여기 음정이나 화음 쌓는 방식도 그렇고, 뒤에 상자 위에 서서 칼 들고 큰 원 그리는 동작 같은 연출이, 어쩐지 테니뮤가 떠오르던데...ㅋㅋㅋㅋㅋㅋ "가자 앞으로 전진" 이라거나 승리를 운운하는 가사 때문에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주 가끔 뮤지컬 보다 보면 만화 원작의 일본 뮤지컬 지뢰를 밟곤 하는데, 딱 이 넘버가 그렇다...ㅋㅋ 아, 2막 첫 넘버 끝나고 무대 하수 쪽 위에서 천막 같은 게 내려오고, 그 끝을 상수 쪽 무대장치 뒤에 거는 장면이 아이다 보면서 감탄하던 그 무대 연출을 연상시켜서 괜히 좋다.
19. 하루 또 하루 (Every Single Day)
크리스티앙이 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편지들을 끌어 안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노래하는 록산. 한 장의 편지 위에,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고 노래하는 시라노.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겠는 벅차고 가득한 제 사랑이지만, 자신이 아닌 그의 글로 사랑을 전달했음을 깨달은 크리스티앙. 세 사람의 목소리가 함께 모이는데, 경티앙은 밖으로 퍼져나가는 목소리고 류라노는 안으로 들어차는 목소리라서, 두 사람의 큰 성량이 약간 맞부딪히는 느낌이었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섞일 때는 서로 받쳐주고 배려하는 게 좀 더 필요할 거 같기도 하고... 별로였다는 건 아니지만 완벽한 화음이라고 하기엔 조금 아쉬웠달까. 물론 세 사람의 감정선은 완벽에 가까웠다.
20.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 (She Loves You)
편지에 담긴 영혼을 사랑한다는 록산의 말에 흔들리는 크리스티앙. 진실을 마주한 그가 시라노와 맞부딪힌다. 팽팽한 긴장감이 선명하게 눈에 잡히는 듯하다. 폭격이 시작된 소리를 "내 심장 소리," 라고 중얼거리듯 말하는 시라노의 말에 객석 뒤쪽에서 웃음이 터져서 조금 의아했다.
20-a. 그녀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것 (I Can Never Tell Her)
진실을 고백하려 했지만 크리스티앙의 중상 소식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시라노. 다 죽어가는 그의 손을 붙잡고 "모든 걸 고백했지만 자네를 선택했어. 그녀가 사랑한 건 바로 자네야." 하고 말해주는 시라노의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더욱 아프다. 마지막까지 진실을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기쁘게 죽어갈 수 있었던 크리스티앙.
20-b. 젊고 아름다운 (So Young, So Beautiful)
이게 록산이 시작하는 넘버가 맞겠지? 죽은 크리스티앙을 끌어 안고 절규하듯 노래하는 록산. 결코 말하지 못할 진실을 고이 접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는 시라노.
21. 곧 (Soon)
전투 소리가 들려오는 중 오롯이 홀로 쓸쓸하게 서 있는 시라노. "초라하고 어리석은 절망 따윈 사치라고" 하며 이를 악물고 거듭 결심을 다짐한다. "크리스티앙의 죽음! 나 시라노의 죽음을!"
21-a. 가스콘 Reprise (Gascons Reprise)
시라노 솔로 아래에 깔리는 앙상블들의 가스콘 맆. "우리는 가스콘 / 영광에 살고 영광에 죽는다 / 우리는 가스콘 / 끝이란 없다 영원히 살리라" 하는 떼창 화음이나, "자 긴장해 / 폭풍이 칠테니" 하며 박진감 넘치게 무대를 장악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웅장하고 멋지다.
21-b. 가을의 나날들 (The Days Of Autumn)
15년 후. 수녀들이 내려놓는 게 진짜 촛불 같던데 안전장치는 잘 되어 있는 거겠지?
22. 최고의 남자 (No Finer Man)
갑작스러울 정도로 시작하는 시라노를 향한 찬가라서 매번 좀 의아하다. 록산의 기분이나 감정을 먼저 깔고 나서 시라노가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말해주는 게 더 나았을 것 같긴 한데 그럼 런닝타임이 더 길어졌으려나.
22-a. 시라노의 신문 (Cyrano's Gazette)
비틀거리며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조금 늦게' 도착한 시라노. 때 아닌 손님이 찾아왔다며, 지금은 때가 아니니 조금 있다 오라며 돌려보냈다는 시라노의 말에 1막의 그 풋풋하던 감정이 겹쳐졌다. 떨어지는 낙엽을 향해 "아름다운 죽음이네요, 하늘에서 땅으로 여행하는 짧고 부드러운 비행" 이라고 묘사하는 목소리에 허망함과 쓸쓸함이 묻어나온다.
23. 안녕, 내 사랑 (Farewell My Love)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보여달라는 시라노의 부탁에 목걸이에서 낡고 다 바랜 편지를 건네는 록산. "나의 천사 / 나의 꿈 / 내 영혼의 숨결 같은 그대여" 하며 발코니 아래에서 처음으로 고백했던 그 문장들을 노래하는 류라노. 그 익숙한 목소리에 비로소 진실을 깨닫는 록산. 애써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며 진실을 숨기려고 하지만, 이미 깨달아버린 록산은 절규하듯 절망한다. 그러나 시라노는 "안녕 그대여" 하고 작별을 고한다. 주간 소식을 마치겠다며 제 상처를 드러내는 류라노. 이제 록산에게 잔인한 건 시라노다.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또다시 '사랑'을 떠나보내야 하는 록산의 절망과 아픔이 절절하게 아프다. "난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해왔어요. 그 사람을 두 번이나 잃을 순 없어요" 하는 대사는 여전히 확 이해가 안된다. 록산이 사랑한 사람은, 크리스티앙도 시라노도 아니었다고 본다. 그의 의도는 분명 아니었겠지만, 록산은 분명 자신이 상상하고 받아들인 '이상적인' 누군가를 사랑한 것이다. 그래서 록산의 진정한 사랑은 실재했지만 그 대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비록 허상이지만 상대를 상실하는 경험은 두 번이나 마주해야 했다. 이 이야기에서 누가 가장 불행한가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남겨진 자의 고통과 아픔은 무겁디 무거운 것이기에 록산을 향한 애틋함과 동정이 짙고 아프다. "첫 눈물과 마지막 눈물은 당신을 위해 흘릴게요," 하고 시라노에게 약속하는 록산.
23-a. 나 홀로 Reprise (Alone Reprise)
삶도 엉망이었는데 죽음조차 엉망이라는 자조적인 시라노의 표정. 하지만 마지막 순간, 죽음의 신을 향해 삿대질 하며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시라노. "희망이 없다고? 희망이 있을 때만 싸우는 게 아니다, 이 멍청아. 희망이 없을 때 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태도지!" 하며 하나하나 위선을 짚어 내는 시라노의 말. "거인을 데려와!!!" 라거나, "내 코가 보이는가!!!" 하는 발악 같은 절규가 한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너무나 극적으로 살려내어 마음이 저린다. 마지막 "홀로" 를 부르지 못하고 무너지듯 쓰러지는 시라노. 시라노의,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위로 천천히 치켜올리는 록산.
으어. 리뷰 쓰는데 하루종일 걸렸네. 이 극은 늘 커튼콜 때 배우들에게 환호를 보내지 못하고 먹먹한 기분으로 박수만 세차게 치곤 했었다. 그러나 이날은 인사 다 마치고 배우들 뒤로 빠지는데 류라노만 앞으로 나와서 환호 유도하셔서 설마, 했는데 갑자기 조명이 무대 앞쪽을 환하게 밝혔고 류배우님이 신나게 스탭 밟는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잘 보여서 저절로 환호가 터져나왔다. 사전에 얘기된 바가 아니었던지, 실컷 춤 다 추고 뒤로 빠진 류배우님이 옆에 있는 배우들에게 궁시렁거리며 메인 조명 삿대질 하시더라ㅋㅋㅋㅋㅋㅋㅋ 조명팀 사랑해요!! 종종 부탁드려요!! ㅋㅋㅋㅋㅋㅋㅋ 유쾌한 컷콜 덕분에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리고 나올 수 있었다. 다음주에 보러 가면 플북 나와 있으면 좋겠다. 오슷 소식도 있으면 더 좋겠고ㅠㅠㅠ 류로듀서님 오슷 좀 부탁 드려요 엉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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