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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엘지아트센터, 2017.08.10 8시 공연
류정한 시라노, 최현주 록산, 임병근 크리스티앙, 이창용 드기슈, 김대종 르브레. 이하 원캐. 류라노, 블리록산, 빙티앙, 용기슈, 대종르브레. 류블리빙용빅벨. 시라노 4차, 류라노 3차, 류블리 3차 관극.
현업이 아무리 바쁘다지만, 개막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이 극을 고작 3번 밖에 보지 못했다는 현타가 들어서 마침 뜬 위멮 특가를 당일 마감 직전 아슬하게 결제하여 엘아센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완벽하고 엄청난, 슬슬 노선변주를 시작하시는 분기점인 회차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이날 공연을 꼭 보고 싶더라니. 이날 공연의 유일한 단점은 3층으로 날아오른 내 자리였지만, 그래도 음향만큼은 깔끔해서 마음껏 눈물 쏟아내며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내일도 가는데 류배우님이 부디 0810 이날의 노선을 유지해주시길 간절히 바래본다.
이날 류배우님의 목소리, 노래, 음성, 이 모든 청각적인 요소들이 너무나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늘 류배우님의 목소리를 사랑해왔지만, 이날 공연을 보는 내내 나의 영혼을 팔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목소리를, 감정이 실린 노래를, 배우님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음성을 감히 요구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내 인생에서 이토록 절절하게 사랑할 '목소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공간이 멈추고, 들이 마신 숨을 뱉는 것조차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주변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심장에 바로 와닿는 노래와 목소리가 손 끝 발 끝 머리 끝까지 온 몸을 채우며 퍼져나간다. 너무 아름다워서, 황홀함에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기분. 풍성한 저음과 안정감 있는 무게감이 실린 모든 음성이, 글이나 말로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류배우님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음이, 그래서 이 순간을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듣고 느끼며 감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 배우님, 오래오래 무대에 현역으로 서주셔야 해요. 무대 위 배우님의 존재 자체가,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밥이 잘 넘어가게 해"줍니다.
※스포있음※
위에서 목소리 찬양만 했지만, 연기 노선도 정말 취향이었다. 자신의 내면에 보다 집중하는, 단정하고 기품 있으면서 고고하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록산 솔로곡 '최고의 남자'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에 정확히 들어맞는 노선이었다. 고집 있고 단호하며 불의를 참지 않는 꼿꼿한 성향이 적을 많이 만들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단단한 모습에 반하여 따르는 친구들 또한 많이 생겨나는 독보적인 인물. 정확히 칭하자면 '친구'보다는 '동료'나 '지지자' 혹은 '추종자'에 가까운 이들이기에 말년에 그리 외롭고 쓸쓸하게 제 내면으로 깊고 깊게 파고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엔딩이, 정말 말도 안되게 훌륭했다. 안녕 내 사랑, 눈부시게 반짝이던 찬란하며 잔인한 비극을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 "잠시만," 하고 속삭이며 록산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대고선 잠시의 정적. "안녕" 이라 떨리는 목소리로 작별을 고하는 아슬한 긴장감. 순간 끄으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신음. 마치, 영혼이 새어나가는 소리. "내 코가 보이는가!!" 라고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는 절규에 울먹임이 섞이는 처절함. 제 상처를 보고 놀라며 무너지듯 흐느끼는 록산을 위로하듯, "날 위해 울지 말아요. 크리스티앙을 위해 울어주세요." 하는 부분부터 15년 후의 세월이 묻어나던 목소리 톤을 싹 걷어냈다. 비록 몸은 늙고 지치고 상처 입어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시라노의 "티끌 한 점 없는 영혼" 본래의 맑은 소리가 시간과 운명을 거슬러 록산의 가슴에 온전히 닿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류라노의 얼론맆이, 그 마지막이 청아하고 고고했다. "죽음조차 엉망진창이네요" 라고 자조하던 씁쓸하고 절망적인 이야기의 비극이, 본래의 순수한 영혼 그 자체로 돌아가며 단정하게 마무리 매듭을 짓는다. "아름다운 죽음이네요" 라고 비유했던 낙엽처럼, "짧고 부드러운 비행" 같은 삶에 작별을 고한다. 공간이 멈춘다. 숨이 멎는다. 사위에 적막만 고요히 가라앉는다.
얼론맆에서 마지막 소절 "홀로" 를 부르지 않는, 혹은 못하는 이유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데, 이날의 류라노는 마지막 순간 록산과 공유한 감정으로 결국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오, 록산.." 하고 다정한 듯 황홀한 듯 생의 마지막 숨에 그 소중한 이름을 얹어 올리는 류라노. 고독하고 쓸쓸한 그 삶의 끝이, 적어도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 해석의 계기는 15년 전 전쟁터의 한 장면이었다. 숨을 거둔 크리스티앙의 품에서 편지를 발견한 록산이 "그의 마지막 편지," 를 붙들고 오열한다. 그 옆에서 류라노가 망연하고 허망한 표정으로 읊조린다. "내 마지막 편지," 라고. 지난 관극 때까지는 크게 와닿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 이날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시라노는,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로 록산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크리스티앙이라는 '매개체'가 생기고, 시라노는 그의 그림자에 숨어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마음을, 사랑을 마음껏 고백하고 쏟아낸다. 자신의 언어가 맺어낸 결실이 전부 빛 속의 크리스티앙에게 주어지는 모습을 보며 "패배뿐인 승리" 라 씁쓸해하던 어둠 속의 시라노는, 빛이 있었기에 어둠이 유의미했음을 빛을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록산에게 표현하거나 전달하지 못한다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한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절망이 류라노의 온 몸을 덮친다. 그저 '친구'로서, 매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라는 정지된 일상의 아주 소소한 부분을 공유하고 위로하던 15년의 세월이 시라노에게 얼마나 짙고 무겁고 어두운 고통이었을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리다. 아득하고 아찔한, 지독히도 고독하고 힘겨웠을 시간. 그, 삶.
마지막으로 이날의 넘버에 대해 조금만 얘기해야겠다. 첫 곡 '나의 코' 부터 지난 관극과는 완연히 달라진 톤과 발성이었고, 애틋한 사랑 넘버 '록산' 의 감정선도 훨씬 더 애틋하고 따사롭게 다가왔다. '거인을 데려와' 역시 무대를 넘어 객석의 공기까지 휘어잡는 음성에 넋 놓고 무대에 집중했다. 1막 피날레곡 Alone에서 "그저 그녀가 행복할 수 있게 도우려 했잖아" 하고 쏟아낸 뒤 중간에 숨을 쉬지 않고 바로 속에서 끌어올린 감정의 목소리로 "아프고," 하며 가슴을 쥐어짜듯 고통스럽게 숨쉬며 무릎을 꿇는다. 지독한 절망 속에서 신과 운명을 원망하지만, 늘 거인과 싸우고 불의에 도전하는 고결한 인간이었던 류라노는 그 감정을 한데 끌어모아 꾹꾹 눌러담고 분연히 일어나 매번 그랬듯 분명한 발걸음으로 다시 나아가리라 결심한다. 눈부시게 벅차오르는 의지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극 내내 모든 노래를 저음으로 더 꾹꾹 눌러담아 불러주셔서 완벽하게 취향이었다. 가스콘의 위엄 있고 섹시하며 멋진 목소리와 가스콘맆에서 모든 운명을 집어 삼키는 듯한 목소리에 심장이 저릴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가스콘맆 중간에 객석을 등지고 서서 앙상블을 향한 채 무릎을 꿇는 걸 처음 본 거 같은데 계속 하시던 건가. '하루또하루' 의 삼중창 후반부가 너무나 훌륭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보지도 못한 류큘 지뢰를 밟은 기분이 들 정도로 완벽한 성악 발성이어서 행복했다. 강렬하고 짜릿하게 지르는 고음에 열광하고 사랑하지만, 풍성하고 매력적인 저음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취향인지라, 류배우님이 장점인 바리톤 음역대와 잘생긴 음성을 마음껏 뽐내실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하고 감동을 받는다. 이대로 몇 번만 더 공연해주시면 제가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배우님ㅠㅠ 이제 바쁜 현업은 거진 끝났으니, 제대로 달려볼게요. 새삼스럽지만, 이 극의 무대 위에 시라노로 서주신 점에 온 마음을 다해 감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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