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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
in 학전 블루, 2017.03.22 8시공연
최우혁 페페르, 김지유 나타샤, 서지영 타냐, 이승현 배우, 안시하 바실리사, 조순창 싸친, 임은영 나스짜, 김은우 백작, 김태원 조프, 이윤우 막스. 이 좋은 배우들을, 작은 소극장 무대 위에서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첫의 의의는 충분했다. 올드하다, 1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등등의 평 때문에 내용에 대한 기대치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갔는데, 취향이었다. 엄청. 일단 더블캐스팅의 두 캐릭터을 다른 캐슷으로 한 번 더 보는 건 이미 확정이다. 4월에 자둘해야지.
자첫을 언제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카드사 초대에 당첨이 되어 빠르게 보고 왔다. 나름 분기마다? 초대권 당첨이 되는 것 같아 행복하다. 엄마랑 보기로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일로 바람을 맞아서 나눔했다. 학전 블루 공연장은 처음이었는데, 좌석 사이 팔걸이가 없더라. 좀 불편하긴 한데, 단차가 꽤 있는 편이라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편한 자세를 취해도 시야방해가 거의 없어서 괜찮았다. 그리고 자유소극장보다는 의자가 편하다^^.... 거긴 진짜, 아니야. 무대가 아늑하고 술집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소품들이 좋았다. 전반적인 조명 사용이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후반쯤에 상당히 드라마틱한 연출이 있다. 의상은 무난하긴 한데 너무 이전 극들이랑 비슷한 감은 있다. 특히 은영나스짜 의상. 창녀 의상은 어느 시절 어느 국가이든 동일한가봐요? 우혁페페르가 시하바실리사 드레스 끝을 밟아서 살짝 위험해보인 장면도 있었고. 문 쾅쾅 닫는 장면이 좀 있어서 후반부에는 참사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배우들이 온몸을 던져 나뒹굴고 뛰어다니는 열연을 해서 조금 걱정이 된다. 바닥이나 소품들이 나무로 되어 있어서 삐걱이거나 우당탕 하는 소리가 잘 나서 생동감은 있다.
연출이 올드하다는 느낌이 뭔진 알겠는데, 러시아 고전 이미지라서 오히려 내 취향에는 딱 들어 맞았다. 개그포인트로 넣은 요소들도 진부하긴 했지만, 배우들이 워낙 찰지게 잘 살려내서 크게 촌스럽진 않았다. 괜한 최신유행 애드립을 넣어서 시대상 및 분위기를 와장창 무너뜨리는 과함도 없었고. 하지만 다소 폭력적인 연출은 불편했다. 후반부 싸친의 폭력에 그토록 적극적인 현실감을 부여해야만 했는지 의문이다. 왕용범 연출에서는 이런 류의 과하다 싶은 폭력이 꼭 들어가는 것 같아서 슬슬 불쾌하다. 극은 현실을 조금쯤 과장해서 보여주는 장르임을 알지만, 지나친 가학성을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건 연출자로서 나이브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어려운 극은 아니다. 담담하게 한 부류의 삶을 그려내는 극이고, 그저 고전소설 하나 눈 앞에서 읽어낸다 생각하며 볼 수 있다. 오랜만에 잡생각 하나 없이 완벽하게 2시간 동안 몰입한 관극이기도 했다. 극 시작한지 얼마 안됐는데 로딩 따위는 전혀 필요 없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음악도 잔잔하지만 풍성하니 좋았다. MR인데도 반주의 악기들이 다채로와서 만족스러웠다. 배우 연기 이야기는 스포가 포함될 것 같으니 아래 문단에서 이어가겠다.
※스포있음※
최우혁 배우는 프랑켄 이후 오랜만이었는데, 정말 몸을 잘 쓰는 배우다. 특히 지유나타샤에게 고백하는 장면부터 쫒기듯 문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가 무척 좋았다. 길쭉한 사람도 저런 몸연기를 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낸다. 나타샤의 순진한 말에 서 있다가 쿠당탕 하며 몸을 옆으로 세우며 탁자에 몸을 기대는 동작이라던가, 그를 안아 들고 휘청휘청 하면서 내려놓고 다리 풀린 연기를 한다던가, 무엇보다 죽은 백작의 시체를 억지로 일으켜세우려는 행동에 완전 치였다. 완전 괴물이잖아ㅠㅠ 프랑켄 뉴괴의 탄생장면이 저절로 연상되는 그 절박하고 고통스런 몸짓이 너무 아프고 애처롭고 속상하고 아팠다. 아직 어린 배우인데도 분노와 절망의 농도가 무척 짙고 깊다. 저음의 묵직한 목소리 또한 큰 메리트가 되고. 다만 나타샤 앞에서 부르는 넘버는 조금 아쉬웠다. 넘버 끝 부분에서 반주 음량에 목소리가 묻히더라. 그거 말곤 대사 치는 것도 아주 능숙하고 표정도 좋다. 초연 팬텀 때 무려 트리플 캐스팅의 주연 역할을 언더스터디가 몇 차례 대신한 그 쥬크리는, 완벽한 러시아 시골소녀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캐릭터의 이해도가 무척 높아서 연기가 훌륭했고, 사랑스러웠다. 다만 넘버의 극고음 부분은 살짝 아쉬웠다. 그래도 워낙 목소리가 예뻐서 '블라디보스톡의 봄' 넘버가 정말 따뜻하고 어여뻤다. 망설인다던가 주저할 때 머뭇거리며 왼쪽 발 뒷꿈치를 들고 발목을 흔드는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다. 윤우막스는 여전히 맑고 꾀꼬리 같았다.
시하바실리사는 지분이 별로 없어서 아쉬운데, 너무나 아름답다. 페페르 유혹하는 넘버에서 제 밑바닥까지 다 내보이는 처절함마저 눈부셨는데, 그 장면의 연출이 촌스러워서 크게 몰입하지는 못했다. 서지영타냐는 역시 넘버, 연기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최고! 순창싸친도 장난스런 모습과 살기에 찬 서늘한 모습의 온도차를 잘 조절하며 극을 멋지게 살려주셨다. 지난 토요일에 만났던 파리의 검사장님은 어디 가고, 사회 밑바닥에서 굴러 먹으며 사기치는 건달이 되어 있었다. 승현배우의 감정도 좋았고, 은영나스짜와 태원조프의 감초 역할도 깔끔했다. 은우백작도 괜찮았는데 죽은 다음에 호흡 때문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어깨가 너무 잘보이는 건 아쉬웠다.
커튼콜까지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자주 보면 금방 질릴 것 같으니 살짝 텀을 두고 몇 번 더 봐야겠다. 좋은 배우들이니 다른 관객들도 많이많이 보러갔으면 좋겠다! 요새 할인도 많이 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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