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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데빌

in 드림아트센터 1관 에스비타운, 2017.03.03 8시 공연



고훈정 X-White, 박영수 X-Black, 송용진 존 파우스트, 이하나 그레첸. 훈엑스, 슈엑스, 쏭존, 하나그레첸. 훈-슈 페어첫공, 쏭-슈 페어첫공. 



이 극의 리뷰를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할 지 퍽 난감하다. 외양만큼은 완벽하게 취향인 디저트의 맛이 너무나 평범한데다가, 그 안에 설탕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갔다는 게 혀 끝으로도 느껴질 정도로 과해서 현입이 확 되는 느낌이랄까. 집중도는 높았지만 감정에 공감하는 몰입은 전혀 안 됐고, 풍성한 음색들에 입가에 웃음이 절로 피어났으나 넘버 자체의 매력은 전반적으로 부족했다. 몇몇 곡의 하이라이트가 놀라울 정도로 섹시했는데 주로 배우들 성대 갈아넣는 부분이었다. 락뮤라서 넘버에 많이 치일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훈엑스의 목소리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왔다. '그 이름' 인가? 잔잔하게 노래하다가 싸비에서 음성을 둥글게 모으면서 호화로울 정도로 웅장하고 강렬하게 소리 내는 파트를 듣고 정말 좋아 죽을 뻔했다. 성악발성에 단단하고 울림 있는 음색의 바리톤이야말로 내가 가장 극렬하게 애정하는 목소리다. 고집있어뵈는 올곧은 신념을 굳건히 새긴 새하얀 엑스가 커다란 성량을 뽐내며 풍성하게 노래하는데 어찌 집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걸로 자첫자막 할 예정이지만, 훈엑스 노래만 한 번 더 듣고 싶다. 만약 재관을 한다면 그 전에 각오해야 할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쉽게 결정이 안 된다. 


스포 다루기 전에 다른 배우들 얘기도 조금 하자. 쏭배우는 자첫이었는데 목컨디션이 베스트가 아닌 점이 매우 아쉬웠다. 하지만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주는 무게감이 좋았고, 연기가 빼어나서 장면장면의 설득력이 높았다. 눈빛과 눈꼬리로 표현되는 감정들이 인상적이었다. 하나그레첸은 노래도 연기도 흠잡을 곳이 없는데 미묘하게 나랑 안 맞는 느낌이었다. 매드그레첸 같은 넘버에서 엄청난 성량과 기교로 그 어려운 곡을 잘 소화하는데 가사가 정확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극 초반에 목이 덜 풀렸는지, 쏭존과 노래할 때 '듀엣'이라면 마땅히 기대하는 두 음색의 조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뭐 개인적인 생각을 기반으로 한 아쉬움이니까 넘어가자. 그리고 슈엑스. 초연에도 했었는데, 넘버 쓰릴하시더라. 아슬아슬하더니 삑이 거하게 몇 번 났는데, 크게 현입되지는 않았다. 특유의 아우라와 뻔뻔함이 실수를 실수라 인지하지 않도록 해주는 배우다. 새까만 양복을 입은 얇고 길쭉한 피지컬. 우아한 냉랭함이 감도는 잔잔한 얼굴에서 입꼬리와 눈빛만으로 일순간 스치는 광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연기력. 무엇보다도 섬세한 작은 손동작들과 가볍지만 묵직한 걸음걸이가 어마어마하게 매력적이었다. 노래만 아쉽지 않았어도 작품마다 쫓아다니는 애정배우가 되었을텐데. 아, 이미 애정배우인가. 슈동주 첫공 보러가는데ㅎ 그리고 앙상블 배우분들도 엄청 좋았다. 노래, 춤, 표정 모두 극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스포있음※


여러모로 따져보면 나름의 의미가 있을 법한 연출이 많았는데, 굳이 그렇게 깊게 파고들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질 않는다. 무대 위쪽이 거울이라던가, 두 엑스들이 셔츠를 서로의 색으로 바꿔입고 나오는 장면들의 의미라던가, 위로 올라가거나 옆으로 나가거나 뒤쪽 문으로 나가는 퇴장동선 같은 것들 말이다. 조명연출은 다양하고 휘황찬란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극 후반부에 배우들 목소리와 조명이 완벽한 타이밍에 쾅 부딪히는 장면이 있었는데, 오싹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과하다 싶게 설명조인 대사로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건 불호. 월스트리트를 무슨 환상의 공간처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극 초반 파우스트의 캐릭터는 몰입을 와장창 깨뜨렸다. 자본주의에, 쾌락에, 오로지 자기자신만의 성공에 정신이 팔려 타락해가는 존의 모습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이 극이 전하고 싶었던 주제의식에 공감이 되질 않았다. 왜 이런 시대, 장소, 상황을 택했는지 알겠는데 너무 비현실적이라 괴리감이 느껴졌다.


초연에는 한 사람이 맡았던 엑스라는 캐릭터를 재연에서는 화이트와 블랙으로 분리한 연출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뻔하지 않았다. 배우들 노선에 따라 페어 별로 이미지가 많이 다를 것 같은데, 훈엑스와 슈엑스는 완고한 善과 여유로운 惡이 대치하는 느낌이었다. 미카엘과 루시퍼의 관계가 연상됐다. 순리라는 '신'을 믿고 인간을 인도하는 훈엑스와 그 신을 향해 비아냥거리고 인간을 통해 도전하는 슈엑스. 인간 자신이 행하는 선택을 존중하며 그저 제안을 건넬 뿐인 빛과 어둠. 첫 장면에서 빛과 어둠의 위치가 바뀔 때가 되었다며 제안을 하는 슈엑스가 킬킬거리는 웃음과 함께 이를 드러내며 웃는 입모양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부르는 이름은 중요치 않다며 다양한 명칭을 내뱉듯 읊는 훈엑스의 노래에 대한 찬양은 위에서 이미 했고. 하지만 '굳이' 관념캐인 엑스를 나눠 지나치게 친절하게 관객의 이해도를 높이려고 한 시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직접 보지도 않았고, 스포가 싫어서 리뷰도 아직 찾아보지 않은 초연이 어땠는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하나의 캐릭터 안에 상반된 두 개의 자아이자 유혹, 혹은 기회가 존재하는 설정이 훨씬 섹시했으리라 생각한다. 누가 봐도 명백한 선악의 분리가 생각의 폭을 제한하고 극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삭제해버렸다. 


근래 여성 캐릭터를 '성녀' 혹은 '창녀'로만 제한하는 뮤지컬의 관습적인 연출에 대한 많은 성토가 쏟아지고 있다. 이 극 또한 새하얀 옷을 입힌 그레첸을 남자인 주인공 파우스트의 '가장 순결하고 소중한 무언가', 즉 성녀로 설정한다. 이 점에 대해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오히려 일일이 지적을 못하겠다. 초연에서 논란이 됐던 강간 장면이 삭제되었지만 상당히 직접적인 가사와 노골적인 그레첸의 동작으로 여전히 불편함을 초래했다. 후반부에서 그레첸이 파우스트는 물론이고 엑스들에게도 아내이자 누이라고 명명되며 성스럽고 고귀한 '승전물'로 취급되는 것이 짜증났다. 죄는 파우스트가 짓고 벌은 그레첸이 받는다. 그 와중에도 파우스트의 죄를 사해달라 빌며 스스로를 희생한다. 단순히 고귀한 사랑으로 포장하기에는 극 내내 깔린 복선이 성녀프레임에 지독할 정도로 꽁꽁 매여있기에, 그 장면 그 대사를 듣는 순간 감동보다는 불쾌가 앞섰다. 



보다 개성 있게 풀어낼 수 있을 만한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의 한계'로 인해 특별함보다는 뻔한 매혹만을 추구한 극이다. 이야기 전개나 구성 자체에 대해 더 고민하고 밀도 있게 의미를 담아 냈더라면 좋은 넘버와 훌륭한 배우들을 통해 아주 독특하고 매력적인 극이 되었을텐데. 그나저나 이거 자둘, 안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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