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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해피엔딩

in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 2017.02.15 8시 공연



김재범 올리버, 전미도 클레어, 고훈정 제임스. 범미도훈정.


오랜만에 회전문이 아닌, '처음 마주하는' 관극을 하고 왔다. 그리고 다시 다작러가 되고픈 욕망이 퐁퐁 솟아나고 있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사랑스러웠고, 기대보다 따뜻하고 묵직했으며, 내심 했던 각오보다 훨씬 더 많이 울고 나왔다. 극 초반에는 아프게 파고드는 가사 몇 개에 눈물이 살짝 떨어졌는데, 후반부는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에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배우들의 인사와 커튼콜 장면 시연까지도 감정을 채 추스릴 수 없어서 힘들었다.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현실적이지만 자극적이지 않게 차곡차곡 쌓아올린 '동화' 같았다. 그래서 잔잔하지만 커다란 파문을 그리며 여운의 잔상을 짙게 남긴다. 모든 회차가 매진인 이유를 알겠다.



※스포있음※


공상과학 혹은 인공지능과 관련된 소재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다. 특히 창조주인 인간과 닮은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감정을 '배우고', '공감하며', 자아를 생성하여 '닮아가는' 스토리라인의 설득력에 대해 매번 의문이 남는다. 어햎만 봐도 '사랑을 하지 않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로봇' 들이 스스로 사랑을 배우고 행하지 않는가. 인공지능이 인간의 행동들을 관찰 및 분석하여 그 행동방식을 습득할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간'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러지 못하길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은 너무나 평온하게 일상적이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전개시켜서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 헬퍼봇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예쁘고 귀여운데 그 안에 든 게 기계든 피와 살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특히 미도클레어. 이제 나에게 '러블리함' 이라는 단어의 대명사는 미도클레어다. 극 내내 클레어의 표정 하나 몸짓 하나 때문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가 움직이고 말하고 살아 숨쉬고 있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와중에 감정선은 또 어찌나 좋은지, 장면장면마다 매력적인 포인트가 있었다. 첫 솔로넘버 '끝까지 끝은 아니야' 의 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노래할 때의 눈빛이,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여러 감정들을 정확하게 콕콕 찔러댔다. 반딧불이 이야기를 하며 이건 헬퍼봇 '6'와 '5'의 차이는 아니라며 올리버를 찍어 누를 때 좋아하는 표정도 무척 귀여웠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감정을 인정하고 복도에서 올리버와 마주하는 장면이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서로에게 고백한 뒤 우연히 손 끝이 스치고, 손등을 마주하고, 손깍지를 끼고, 서로의 얼굴을 만지고, 엉거주춤 포옹하고, 입술을 맞대며 아기자기하고 따뜻해보이는 키스까지 이어진다. 그 일련의 행동 하나하나마다 느껴지는 짜릿한 경이에 놀라워하고 감동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표정이, 추상적인 감정을 정의된 그 자체로 구체화하여 표현했다고 밖에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토록 눈부시게 반짝인 찰나의 순간을 정돈되고 절제된 글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물론 범리버도 좋았다. 특히 후반부. 남은 시간을 알지 않냐는 클레어의 말에 "900일에서 1200일," 하고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한 뒤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로 "5는 6보다 내구성이 좋으니까," 하는데 그 순간부터 숨이 턱 막혀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고 난 뒤 남겨질 자의 슬픔과 고통이 어떠할 지 능히 짐작할 수 있기에. 그래서 엔딩의 그 반전을 예상했음에도 너무 아팠다. 모두 잊어버리자 말한 뒤 다시 충전기를 찾아 제 집 문을 두드린 클레어를 집 안에 들인 올리버. 범리버는 화분을 향해 쉿, 하고 말한 뒤 "괜찮을까요?" 하는 클레어의 물음에 한 텀을 두고 파들거리는 입가에 미소를 애써 걸며 답하는 목소리, "어쩌면요," 하는 대답에 애써 참아내던 오열소리를 뱉어낼 뻔했다. 여운과 애틋함이 공존하는 그 표정. 그 일렁이는 감정. 극의 진행 속에서 쌓아올리다가 훅 치고 들어오는 묵직한 전달력이 강한 배우다. 


훈정제임스는, 배우 본인을 자첫한 관극이었는데 기대했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서 무척 반갑고 신기했다. 첫 넘버 '우린 왜 사랑했을까' 에서 낡은 엘피판의 음질처럼 들리도록 만든 음향 연출이 있었는데, 그 분위기와 배우의 음색이 엄청 잘 어울려서 극에 확 몰입이 됐다. 게다가 수트빨도 좋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중간에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순간의 이야기와 그 멜로디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제임스 역할이지만 멀티도 했는데, 우체부 역할의 마지막 등장에서 걸음걸이나 분위기만으로 세월이 흘러 '인간'은 늙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더데빌도 일부러 훈정엑스 나오는 회차로 잡아놨는데, 기대된다.  


뭐 소소한 의문점들이 있긴 하다. 너무 낡아서 인간이 살기도 어려운 아파트였겠지만, 그래도 버려진 헬퍼봇들을 위한 주거공간을 내버려 둔다니 너무나 꿈 같은 복지정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해저터널을 사용해서 제주도까지 가는데 사백몇키로라면, 서울근교 아닌가. 수십년이 지나더라도, 부동산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응당 그 공간 싹 밀어내고 새로운 아파트 지어서 인간에게 팔텐데 말이지. 멀쩡한 인간도 강제로 밀어내는 판국인데, 전원 끄기만 하면 되는 로봇을 그대로 내버려 두다니...ㅎ... 너무나 판타지 아닌가. 그리고 제주도에서 찾아 병에 담아 온 그 반딧불이. 반딧불이 수명이 두 달이라고 대사에도 있었는데, 그럼 집으로 돌아와서 서로 애틋하게 사랑하고 눈물나게 이별하기까지 고작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는 건가. 행복이 지나칠 정도로 짧은 찰나였다니, 더 아프잖아. 또 극 중간에 두 번인가 무대 하수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데 그건 의미가 있는 연출인 건가? 그만하자는 클레어의 말에 주변을 정리하던 올리버가 건네는 쪽지 안의 내용은, 어댑터 사용 방법이 아니라 '이웃집 문을 노크하세요' 였던 걸까? 그렇게 다시 한 번, 클레어와 마주할 수 있도록? 



"고마워요," 하는 말에 한 손가락을 번쩍 들며 "천만에요!" 라고 자동으로 응답하는 기능이 삽입되어 있다던 헬퍼봇5 올리버와 그런 그를 향해 세상 누구보다 예쁘게 웃으며 장난치는 헬퍼봇6 클레어의 이야기. 사랑에 빠지지 않기로 약속해놓고, 넘실거리는 감정에 온 몸을 오롯이 맡겨버리는 두 존재. 그 결말이 정해져 있기에, 그것도 근사값이 상당히 정확한 수치의 기간만이 바로 앞에 놓여 있기에, 더 애틋하고 더 아프고 더 눈부셨다. 점점 망가지는 클레어의 몸과 그런 그를 향해 뭐든 해주려 안절부절 못하는 올리버를 보며 일드 '1리터의 눈물' 과 '내가 있었던 시간' 이 연상됐다. 불치병에 걸려 점점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답답함고 고통, 그리고 그저 도와주고 곁에 있어주는 것밖에 해줄 수 없는 주변사람들. 아아, 여러모로 이 극의 여운은 너무나 짙고 무겁고 아프다.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극. 다음 시즌 올라오면 가족이나 친구를 데리고 가야겠다. 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극을, 모두가 마주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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