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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
in 샤롯데씨어터, 2016.11.17 8시 공연
무척 오랜만에, 매 장면마다 화려하고 완성도 있는 무대연출에 감탄하며 즐길 수 있었던 극을 만났다. 게다가 아름다운 무대 만큼 매력적인 절절하고 운명적인 러브스토리를 익숙하지만 따분하지 않게 구성한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연말연시에 단체관극하기 딱 좋은 대극장 공연이다. 어째 홍보 같지만, 진심이다. 오히려 이런 생각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여러 번 관람하지 않을 생각이기도 하고 말이다. 무대 연출이나 앙상블 군무를 보러 한 번 쯤 더 관극하고 싶긴 한데, 내년초에 시간이 허락할 지 모르겠다.
윤공주 아이다, 김우형 라다메스, 아이비 암네리스, 성기윤 조세르, 이하 원캐. 공주아이다, 소녀라다메스, 과자암네리스. 윤공주 배우는 역시 좋았다. 강단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공주 아이다를 아주 강렬하게 표현해냈다. 1막 마지막곡 The Gods Love Nubia 에서의 그 강인한 자태는 보는 이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명랑함 보다는 처절함을 훨씬 풍성하고 아름답게 표현해내는 배우여서 아이다 역이 잘 어울렸다. 김우형 라다메스 또한 기대만큼 좋았다. 이 배우의 음색은 분명 취향이 아님에도, 노래하는 목소리 근간에 보드라우면서도 따뜻한 진심이 두텁게 깔려있어서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는다. 저음이 훨씬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생각해서 넘버들의 음역대가 전반적으로 높은 점이 아쉽긴 했지만, 고음을 뽑아내고 다루는 방식이 레미 때보다 더 능숙해진 느낌이어서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다. 외모나 피지컬은 물론이고 꼿꼿한 자세에서 풍겨나오는 아우라도 매혹적이다. 2막 Like Father Like Son 에서 넓은 어깨를 쫙 펼친 단단한 뒷태가 무척 아름다웠다. 하얀 웃옷이 딱 달라붙는 뒤쪽 어깨라인과 허리를 빳빳하게 세워 살짝 들어간 등허리 라인이 얼마나 섹시하시던지. 변태 아닙니다. 아마. 아이비 암네리스는 기대 이상이었다. 극의 포문을 여는 1막 첫 넘버 Every Story is a Love Story 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마음을 내려놓고 봐야겠다 싶었는데, 본격적인 극이 시작되고 난 뒤의 캐릭터 연기와 그에 어울리는 노래 강약조절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직전 작품 위키드의 글린다 지뢰가 팡팡 터졌다. 사랑스럽고 푼수 같은 캐릭터를 맛깔나게 살려내지만, 아직 카리스마나 묵직하고 안정감 있는 연기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매력적인 캐릭터 덕분에 극 중간에 많이 웃고 박수칠 수 있었다. 이런 류의 캐릭터를 맡으면 앞으로 믿고 볼 수 있겠더라. 원캐 강은일 메렛은 뉴시즈에서 만났던 배우라서 반갑긴 했는데, 대사 몇 번 씹는 건 아쉬웠다. 로딩은 극 올라오기 전에 끝냅시다. 무난했는데 훨씬 매력적으로 살릴 수 있는 캐릭터임이 분명하니 조금 더 분발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앙상블은 노래가 거의 없고 군무 위주였는데, 어쩜 그렇게 구멍 하나 없이 딱딱 맞게 움직이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Dance of the Robe 등의 장면에서 만들어내는 누비아인들의 군무에서 지크슈 지뢰를 살짝 밟기도 했다. 황폐한 무대 이미지부터 민중들에게 둘러싸인 지도자의 고뇌까지, 완벽하게 템플씬이 떠올라 버렸다ㅠㅠ Another Pyramid 에서 조세르를 둘러싸고 남앙들이 펼치는 군무들도 아주 임팩트 있었다. 절도 있는 동작에 아이돌 무대 보는 기분마저 들었는데, 조명이나 치고 들어오는 반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먼 옛날의 이집트 전성기라는 극의 시대상과의 괴리감이 전혀 없었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페스트와 도리안을 포함한 몇몇 극의 무대들....ㅋㅋ.... 신선하고 파격적인 시도는 언제나 환영하지만, 극 안의 모든 장면들은 서로 어우러지며 궁극적으로 극 전체를 하나로 완성시킨다는 것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그 점에서 아이다는 4연 답게, 디즈니 특유의 극 답게, 완성도 있는 각각의 무대들이 짜임새 있게 이어지며 깔끔한 완결을 지었다.
※아래 한 문단 연출 스포 있음※
전반적으로 연출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수평으로 길게 그린 수풀과 그 모습이 물에 비치는 잔상이 위아래 대칭을 이루고 있는 배경 실루엣. 수영장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무대를 세우고, 그 청량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푸른색의 물 밑에서 와이어를 매달고 아래쪽에서 위쪽로 헤엄치는 두 명의 앙상블을 배치하는 연출. 런웨이와 휘황찬란한 의상 및 모자들. 2막 첫 곡 A Step too Far 에서 삼각형 안에 서서 차례로 조명 받으며 노래하는 세 주인공. 부자 간의 대립씬에서 네 명의 앙상블이 긴 봉을 가지고 링을 연상시키는 마름모 모양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1막 Elaborate Lives 에서는 라다메스가 노래를 시작하고 아이다가 중반부터 동조하지만, 2막 맆에서는 그 반대로 진행되는 구성. 어둠 속에서 답답하게 갇힌 네모난 상자, 막을 통해 점점 좁아지며 잠식되는 공간. 능히 예상할 수 있긴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적절히 매듭짓는 수미쌍관의 연출. 사실 다 떠나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따로 있었다. 나일강과 강변이 그려진 큰 천을 무대 위에서부터 늘어뜨려 빨래터를 만든다. 라다메스와 아이다가 무대 앞쪽에서 이야기하는 사이 행인처럼 앙상블 몇 명이 지나가면서 천의 각 변마다 세 군데 씩 고리를 걸고 퇴장한다. 배우의 대사로 장면이 변하면서 와이어가 서로 다른 높이로 동시에 확 들어올려진다. 가벼운 바람에 천이 일렁거린다. 물이 그려진 부분과 땅이 그려진 부분의 천 재질이 다른 건지 혹은 주름을 다르게 잡아둔 건지 일렁거림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 장면이 전환되면서 양 끝 앞쪽의 와이어가 고리가 툭 끊어내고 그 뒤의 와이어도 이어서 느릿하게 아래를 향해 길게 늘어진다. 동시에 천의 중앙 쪽 와이어는 살짝 위로 솟으며 천천히 뒤쪽으로 한데 모아진다. 천막이 생기고 그 안에서 라다메스와 앙상블들이 소품을 가지고 들락날락한다. 아, 정말 좋더라. 글로써 묘사해서 잘 안 와닿겠지만, 충격적으로 독특하고 예뻐서 시각적인 임팩트가 어마어마했다. 연출이 좋아서 울고 싶었던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는데..... 이 장면을 1층에서 보면 또다른 느낌이겠지. 자둘할까.
여타 뮤지컬 중에서도 넘버가 유달리 많이 들어간 극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대사 몇 줄 하다가 바로 넘버가 진행되니까 간만에 뮤지컬 보는 기분 팍팍 나더라. 다만, 그 안의 가사들이 전체적으로 별로여서 조금 아쉬웠다. 한글로 충분히 번역이 가능함에도 굳이 영단어를 사용한 부분도 있었고, 가사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아서 맥락을 놓치기 쉬웠다. 그렇다고 묘사가 아름답다거나 비유가 유려한 것도 아니었고. 넘버는 오케 반주가 풍성하고 악기도 다양해서 귀가 즐거웠다. 반주가 정말 좋았떤 것 같아. 살짝 뽕삘이랄까, 좀 독특한 느낌의 노래 멜로디가 더러 있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팀라이스 작곡이라고 해서 넘버에 치일까봐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완전히 rock 장르가 메인이어야 내 취향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 같다. 팀라이스에 디즈니를 끼얹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디즈니 노래가 대중적이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으며 쉽게 흥얼거리기 좋아도, 취향저격! 이라는 기분은 느낀 적이 없다.
커튼콜 때 아이다와 라다메스가 현대 복장 입고 나오는 거 정말 아쉬웠다. 연출가의 의도가 나름대로 짐작은 되지만, 라다메스 의상은 이집트 버젼이 훨씬 멋지단 말이다ㅠㅠ 아, 인사할 때 왜 라다메스가 중앙에 서고 대표로 오케에 박수 쳐주는 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극 이름은 '아이다' 이고, 비슷한 비중이긴 하지만 누가 뭐래도 아이다가 주연이다. 아주 사소한 지적이지만, 여성이 주인공인 극 자체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짚어야할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여성 캐릭터 자체를 주체적이고 올바르게 그려내는 극 자체가 거의 제로에 수렴하는 현 업계 상황을 볼 때, 사소해 보이는 것부터 의식을 꾸준히 바꿔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극도 완벽하게 '성차별' 을 도려내지는 못했지만, 시대상이 있으니 감안은 해본다. 그나마 이집트니까 여왕이 가능하지......
이런저런 공연들의 지뢰를 잔뜩 밟은 관극이었다. 표정도 어느 정도 보이고 무대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1층 중블 중앙 자리에 한 번만 더 앉아볼까 고민이 된다. 일단 12월은 패스고, 내년초에 기회를 엿봐야겠다. 주연배우의 다른 더블 캐스트들도 궁금하다. 자뮤페 때 주구장창 틀어주던 티져 때문에 기대가 컸는데, 그 이상으로 좋은 공연이어서 행복했다. 이 극은 누가 물어봐도 강추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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