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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얼굴 1895

in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2016.10.12 8시공연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김선영 명성황후, 이창엽 고종, 정원영 휘, 조풍래 민영익, 금승훈 대원군, 김도빈 김옥균, 이혜수 선화 외 서울예술단 단원. 여왕황후, 뉴고종, 햇살휘, 또옥균. 



이 공연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좋아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심지어 김선영 배우님 복귀작이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든 반드시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서예단 작품 답게 짧은 공연기간으로 초조하게 날짜를 재보다가, 결국 궁금했던 슈고종을 포기하고 엽고종 첫공을 보게 됐다. 이창엽 배우는 얼마전 데뷔작 마돈크 때부터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대했던 것만큼 잘생겼고, 예상했던 것보다 연기가 훌륭했지만, 각오했던 것보다 노래는 아쉬웠다. 햇살, 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원영 배우는 생각했던 이미지보다 훨씬 동글동글한 느낌이었다. 감정선이 무척 좋았지만, 극 초반부터 울먹이니까 자첫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흥이 깨졌다. 게다가 객석 이곳저곳에서 첫 넘버부터 눈물을 닦아내니까, 분명 스포를 밟지 않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극의 이야기 전개와 결말이 너무나도 쉽게 예상이 되어서 오히려 클라이막스에서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솜에서 이석준 배우가 관객들이 극 초반부터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의 맥락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 비난 혹은 비판의 목적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관극에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 목적으로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 뿐이다. 



김선영 배우는, 역시! 훌륭했다. 단단하고 유려한 목소리와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아낌없이 선보였다. 답답하고 흐릿한 토월 공연장의 끔찍한 음향을 완전히 무시하고, 곧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내뿜는 넘버와 대사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사극 대사 어투가 어색한 건 아니었는데, "~까↗↘?" 처럼 몇몇 어미에서 특유의 어조가 있어서 신기했다. 딱히 거슬리지는 않았는데,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인 힐난의 느낌이 강해져서 '국모'의 위엄 있는 이미지와 썩 어울리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모습이 여왕황후가 택한 노선과 의외의 시너지를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을 향한 온갖 적대와 모욕과 비난과 공격에 대한 자기방어기제로, 유약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본성 일부를 완전히 억누르며 더욱 잔인하고 표독스럽게 말하고 행동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높고 위압적이기 그지 없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가엾게 파르르 떨고 있는 본질만이 남는다. 명성황후라는 역사적 인물이 상당히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갸륵하기만 한 것도, 당당하기만 한 것도 아닌 여왕황후의 이 노선이 적당한 합의점을 찾은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예술단' 이라는 이름에서 나름대로 상상했던 '지극히 한국적인 고혹미' 와는 맥락이 다른 우아함과 청아함이 극장 전체를 아우르는 극이었다. 일단 의상이 극도로 아름다워서 배우들 몸짓 하나하나를 완벽함 그 자체로 승화시켰다. 명성황후 의상, 특히 겉옷이 무척 아름다웠고, 고종의 의상 역시 우아하고 세련되며 섹시했다. 부드러운 옷자락 끝단이 빳빳하게 살아있어서 턴이나 점프 등의 모든 동작이 한층 고급스러웠다. 군무에서 한국무용의 춤선은 또 어찌나 매혹적인지. 유난히 눈에 띄는 여자 단원이 두어분 있었고, 전봉준 역으로 분하셨던 단원의 춤도 멋드러졌다. 무대 자체가 마치 인형극에서 볼 수 있는 네모 반듯한 상자 같아서 절제미가 돋보였다. 무대가 조금 멀고 어두웠지만, 5열 정중앙 자리는 정말 완벽하게 시야가 탁 트여 있어서 무대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앞사람 때문에 시야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이렇게 단차 괜찮은 자리가 정말 드물다. 이 극장만 해도 일단 오피석은 아예 단차가 없고, 5열보다 앞쪽은 앞뒤 좌석 간 지그재그가 덜해서 시야방해가 있을 수도 있겠더라. 그리고 음향은 정말...... 후우. 맨 처음에 고종 노래하는 파트 무슨 가사인지 단 하나도 못알아들었다. 정중앙 자리만 아니었으면, 양 옆에 스크린으로 뜨는 자막을 보고 싶었을 정도였다. 휘 노래는 가사가 다 들리긴 했지만 작고 답답해서 아쉬웠다. 카랑카랑한 여자 보컬만 간신히 살아남는, mr 조차 음질이 무척 떨어지는 음향의 대극장이라. 막귀인 내가 음향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오긴 오려나.  



※스포있음※ (물론 역사가 스포이긴 함)



스토리에는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봤다. 이 극은 세 번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세 번의 장례식을 치뤄야했던 여인 명성황후에 대한 음모론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한 창작품이다. 주인공 자체가 워낙 다양하게 평가 받는 역사적 인물이라서 팩트와 개인적인 가치관 및 편견에 따라 받아들이는 이야기의 폭과 깊이가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 등의 사건, 대원군과 김옥균, 민영익 기타 근대사의 실존 인물의 등장 등으로 인해 내용이 부담스럽거나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극의 핵심 인물을 설정하여 캐릭터가 이끌어내는 감정선을 표현하고 주제의식에 투영하는 방식이 조금 난삽했다. 이야기의 전체 틀을 풀어내는 방식이 불친절해서 초반에는 이걸 내가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살짝 걱정하기도 했을 정도다. 물론 익숙치 않은 방법으로 다듬어낸 공연에 바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서예단 특유의 정체성이리라 생각한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공연들도 한 번 씩은 꼭 챙겨보고 싶다. 





극 초반에는 김선영 배우를 무대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고 행복했는데, 넘버 '새야 새야' 에서 '내가 울었노라' 로 이어지는 그 부분의 표정과 목소리와 연기에 제대로 격침당했다. 벼락 같은 충격이라기 보다는, 오싹한 전율이 잔잔하지만 확실하게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저절로 입을 벌려 감탄하게 되는 위압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 반전의 순간, 객석과 무대 사이의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전달되는 광기가 스쳐지나가는 표정. 온갖가지의 원망과 비난과 탄식의 말들에 짓눌려버리기 직전 가냘프지만 단단한 몸 전체에서 내뿜는 섬광 같은 노여움. 그 감정과 표현력을 대체 어떻게 글로써 묘사할 수 있을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씹어 삼켜질 듯한 그 순간의 분위기가 여즉 생생하다. 무대 높이로 인해 만들어진 계단을 내려오는 걸음 걸음마다 그의 눈물이 만들어냈다는 시커먼 심연의 못이 찰랑거리며 만들어지는 듯한 환상이 절로 피어올랐다. 넘버 끝날 즈음에는 결국 멋모르고 차오르던 눈물이 흘러넘쳤다. 나 자신이 느끼는 슬픔과 애통과 비난과 감동 기타 등등의 감정은 전혀 생겨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여왕황후 본인이 내뿜는 감정 자체로 인해 조건반사처럼 눈물이 솟아나더라.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무척 신선하고 자극적이었다. 여타 배우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질감의 흡입력이 짙은 농도로 휘감는 기분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여왕 넘버 끝날 때마다 열정적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어서 아쉬웠다. 커튼콜 촬영 가능한 극이라서 기립도 눈치보여서 못했고ㅠㅠ





"눈을 사로잡는 소란스러움". 마음 속으로 이 극을 이렇게 정의내렸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몸짓과 옷자락들이, 인간의 시각이 탐할 수 있는 미의 욕망을 만족스럽게 충족시킨다. 하지만 시각적인 요소를 제외한 것들은, 미묘하게 어지러이 흩어진다. 구심점을 잡고 탄탄하게 응집되어 있기 보다는 완만한 경사로를 지그재그로 굴러내려가며 종착역에 도착하는 느낌이다. 그 과정이 낮은 파장에서 소란스럽게 진행된다. 극 자체에 도형으로 구성된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관극평이 나오는 건 처음이라 개인적으로도 신기하고 재미있다. 다양한 작품을 마주하고 알아가면서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된다. 



다다다다,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서예단 단원들의 가볍고도 단단한 발걸음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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