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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in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2015.12.10 8시 공연





역시 고전은 고전이다. 1막 초반까지만 해도 음향이나 휑해 보이는 무대에 자첫자막으로 아쉬움 없이 끝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차곡차곡 쌓이는 캐릭터들 솔로곡의 감정선과 풍성한 앙상블의 노래, 그리고 마지막까지 기복 없이 이어지는 탄탄한 스토리의 힘에 영혼을 빼앗겨 버렸다. 다른 극을 볼 때와는 또다른 기분. 어둡지만 반짝거리고, 비극적이지만 희망적이고, 슬픈데도 벅차오르는 감정. 이제는 진부해질 만한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아름답게 가슴을 울린다.  





장발장 양준모, 자베르 김우형, 판틴 전나영. 가브로쉬 이태경, 어린 코젯 박예음, 어린 에포닌 전예진. 이하 원캐. 양발장, 우형자베르, 나영판틴.  



※스포있음※



Look Down 부터 시작하여 촛대를 훔치고 달아나다 붙잡힌 후 신부님의 관용에 크게 깨우치는 장발장. 새로운 인생을 살리라 다짐하는 모습. 그 일련의 장면이 전부 프롤로그였다. Les Miserables 이라는 극 이름이 그제서야 화면에 등장한다. 이 초반부의 음향이 너무 별로여서 내적 탄식을 수없이 내뱉었다. 엘리 때 오블이어서 음향이 별로였던 게 아니라 그냥 이 공연장 자체의 음향이 쓰레기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1층 2열 중블이라고!!! 어떻게 이 자리 음향이 이 수준이냐고오...ㅠ 여기서 류배우님 공연을 봐야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뒤로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긴 했다. 앙상블들 떼창의 가사도 거의 다 들렸고, 오케 음향이 작으니까 메인 배우들 솔로넘버에서 목소리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넘버 마지막 음을 멋지게 뽑아내고 손짓으로 딱 끝내는 순간, 오케도 같이 콰광- 소리를 내며 완벽하게 넘버 마무리를 해줬으면 좋겠다. 웅장함이 생명인 이 극에서 그런 식의 강조 없이 노래가 끝나버리니 영 탐탁치가 않다. 전반적으로 오케에서 깽깽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경박스러웠다. 편곡도 조금 있는 것 같은데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지간하면 오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삼가지만, 아쉬움이 커서 조심스럽게 남겨본다.





비참한 인생. 그 와중에도 서로를 갉아먹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암담하다. 나영판틴 노래가 정말 좋았다. 딕션을 걱정했는데, 완벽한 기우였다. 왜 걱정했는지 모르겠다. 풍성한 표정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잔잔한 I Dreamed A Dream 넘버를 매력적으로 살려냈다. 판틴의 죽음을 보며 이대로 그가 극후반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캐릭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였는데, 공연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변화를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확실히 좋은 배우는 초연보다는 재연, 삼연을 거듭하면서 겹겹이 쌓아가는 경험을 통해 극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그래서 갈수록 좋은 공연이 되는 거고. 



판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코제트를 데리러가는 장발장. 언제나 함께 하겠다는 약속. 시간은 흐르고 파리의 거리는 여전히 더럽고 여전히 비참하지만, 일렁이는 혁명의 기운으로 생동감이 가득하다. 술집 장면부터 계속 시선을 강탈하던 종선시몬, 아, 이제 시몬이 아니지. 캐슷보드에 졸리 역으로 이름을 올린 최종선 배우에게 괜히 한 번 더 눈길을 주고 혼자 좋아하게 되더라ㅋㅋ 짧은 흑발에 멀끔히 차려입으니 아주 훈훈했다. 나름 비중있는 앙이라서 ABC Cafe 나 The Barricade 등의 도입 파트를 불렀고, 중간중간 육성으로 앙졸라나 마리우스에게 뭐라뭐라 하는 생목소리의 외침도 몇 번 있었다. 종선배우는 왼블 쪽에 많이 등장하니 참고하세요ㅎㅎ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운명적인 만남. 동시에 장발장과 자베르의 악연 가득한 재회. 자베르의 솔로 넘버 Stars. 우형자베르의 목소리와 안정적인 저음이 얼마나 매력적이던지ㅠㅠㅠ 자베르는 김우형 배우 고정으로 돌아야겠다. 나중에 류배우님이 불러주시면 정말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그 와중에 했고. 양발장도 우형자베르도 나이가 든 모습일수록 연기와 노래에 깊이감이 더욱 무겁게 실렸다. 자베르라는 캐릭터는 레미에서 '악역'이란 인상이 강하지만, 글쎄, 개인적으로는 자베르 같은 사람도 사회에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애처롭고 고통스러웠다. 자베르처럼 꼬장꼬장하고 원리원칙주의자인 꼰대가,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간절하게 필요한지 모른다. 후우. 아무튼 이 넘버에서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당당하고 각오에 찬 자베르다. 센느강의 다리 난간과 밝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배경으로 노래하는 그의 형형한 눈빛이 아주 훌륭했다. 어지간하면 관극 도중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는데, Stars 끝나고는 저절로 손이 올라가더라. 





One Day More. 레미제라블의 핵심 넘버. 각기 다른 가사로 노래하는 부분에서 소리가 서로 물리면서 뭉개지곤 하는데, 생각보다 충돌 없이 말끔하게 들려서 좋았다. 저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웅장한 넘버. 1막을 이 곡으로 끝내기 위하여 100여분을 그토록 열심히 달려왔다. 엄청 긴데 어쩐지 아쉬움이 옅게 남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버린 시간. 이어지는 2막은, 이제 새로운 세대를 알린다. 



2막에서는 연출 몇 가지가 시선을 잡아 끌었다. 마리우스를 끌고 지하 하수구를 헤매는 장발장. 그리고 센느강에 몸을 던지는 순간의 자베르. 자칫하면 우스꽝스러워질 게 분명한 연출이었음에도, 적절한 영상과 조명 타이밍,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꽤 신기하고 독특한 장면을 완성시켰다. 전체 무대가 어둡긴하지만, 가까운 자리 덕분이었는지 답답한 느낌은 크게 없었다. 라만차만 해도 앞열에서 되게 답답했었는데, 아무래도 영상이나 포인트를 주기 위한 밝은 조명이 중간중간 나와서인지 눈이 덜 아팠다. 블퀘가 조명은 참 좋다. 무대까지의 거리가 무지 멀다거나 음향이 역대급으로 구리다거나 등등의 핵심적인 단점이 커서 그렇지.





The First Attack. 혁명군에게 잡혀 있던 자베르에게 자유를 주는 장발장. 이해할 수 없다, 원하는 게 뭐냐, 차라리 여기서 날 죽여라, 강하게 반발하는 자베르. 당신은 항상 틀렸어, 떠오르는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애써 가라앉히며 담담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하는 장발장. 두 사람의 감정선이 절정으로 부딪히는 장면. 용서와 혼란. 믿고 있던 모든 가치들의 붕괴. 한 치의 양보 없는 대립이, 각자 내 인생이 옳았다며 온 힘을 다해 강변하는 절박함을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흔들리는 눈빛, 내면에 피어난 근원적인 의심, 찰나의 고뇌. 우형자베르의 표정 정말 좋다. 이를 악물고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양발장의 표정 역시, 수많은 감정을 흘려보낸다. 



하룻밤의 정전. 모두가 잠든 시간, 가만히 울려퍼지는 목소리. Bring Him Home. 애정, 연민, 사랑. 그 모든 감정을 전제한, 간절한 기도. 애틋한 표정으로 마리우스를 바라보는 장발장. 폭풍 전야의 고요함.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흐릿하고 잠잠한 분위기. 뜨겁던 토론과 격분에 찬 목소리, 쏟아지던 총성과 화학약품 냄새, 절규와 피냄새, 아수라장 같던 순간들은 마치 지나온 꿈인양 멀게만 느껴진다. 아름답지만 아프다. 이 장면은 장발장의 마지막 순간과 맥락을 같이 한다. 결국 과거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도망쳤지만, 찾아온 코제트의 손을 붙든 채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자듯 스러진다. 드디어 아늑하게 누워 쉴 수 있는 곳, 자신의 '집'을 찾았다는 듯이 편안하게. 본래 떠나는 자보다 남겨진 자가 더욱 슬픈 법. 장발장이 남긴 회고록을 끌어안고 우는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뒤로, 장발장이 판틴이 에포닌이 그리고 먼저 떠난 혁명동지들이 노래를 시작한다. 목소리가 모인다. 희망이,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가득한 노래. 쏟아지는 새하얗고 환한 빛 속에 둘러싸인 사람들. 쏟아지는 갈채. 



커튼콜 때 오케가 왜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다. 배우가 인사할 때 반주가 없으면 엄청 헛헛한데ㅠ 앙졸라의 민우혁 배우가 어깨도 듬직하게 벌어져 있고 목소리도 좋아서 감탄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 배우 만난 적이 있었다. 작년 봄에 풀하우스에서 서브남주로ㅋㅋㅋㅋㅋ 역시 배우도 배역을 잘 만나야 해... 앙졸라가 너무 멋있어서 시선을 자꾸 뺏겼다. 마리우스 역의 윤소호 배우도, 몸을 유연하게 쓰지는 못하던데 그거 말곤 좋았다. 레미의 어떤 버젼에서든, 넌씨눈의 마리우스에게 호감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솔로곡 말고는 별로 집중하지 못하긴 했다. 코제트 역의 이하경 배우는 목 관리 잘 하셔야겠더라. 고음이 꽤 많은 캐릭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목이 상하기 십상일 것 같다. 에포닌의 박지연 배우는 목 컨디션이 베스트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연기도 노래도 좋았다. 떼나르디에 부부 역의 임기홍, 박준면 배우들은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극의 마지막까지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딱 상상 그대로의 얄미운 부부를 연기해줘서 좋았다. 앙들은 전반적으로 표정과 몸짓 연기가 정말 훌륭했다. 레미제라블의 명성답게 웅장하고 멋들어진 노래를 잘 살려줘서 너무도 고마웠고.





이번 공연이 라센 재연이라는 이야기에 놀랐다. 겨우 재연이라니. 어쩐지 한국어 버전의 가사가 생경하더라니. 그래도 생각보다 번역이 매끄러웠다. 뭔가 영어 가사처럼 입에 찰싹 달라붙는 느낌은 덜하긴 한데,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가사집 팔았으면 좋겠다. 플북에 가사 전부 있나...? 지금 당장 자둘을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일단 다음주의 4차(...) 티켓팅은 해둬야겠다. 이날 공연도 예매일이 무려 3달 전인 9월 중순이라서 새삼 기함을 했다. 뭐, 캐슷발표를 다 하지도 않은데다 3달도 넘게 남은 공연 티켓팅도 해야할 판인데. 후우. 아무튼, 역시 레미제라블이었다. 고전이자 명작. 정말 꼭 한 번쯤은 봐야하는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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