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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in 샤롯데씨어터, 2015.11.24 8시 공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고전이고 명작이라 칭하지만, 한 번도 원작이나 영화 등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혹평이 많은 뮤지컬 바람사를 예매할 때만 해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크게 기대할 것도, 그러니 크게 실망할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극을 보고 나온 지금은, 차라리 원작을 알았다면 그 많은 내용들을 2시간 40여분 안에 다 담아내느라 이것도 쳐내고 저것도 생략했구나 하고 납득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줄 수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된다. 전하고 싶은 주제에 대한 무게중심의 부재로 인해 극이 산만하고 난잡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이곳저곳으로 튀는 대사와 극의 전개, 여기에 초연보다 나아진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난해한 넘버들이 더해져 종국에는 가벼운 두통마저 일었다. 트로트풍이라는 이야기를 안 듣고 간 것이 아님에도, 경박하기까지 한 반주의 악기 소리 때문에 귀가 아팠다. 여러 번 바뀌는 무대는 오히려 번잡하게 치고 빠지지 않아서 괜찮았다. 화려한 의상과 앙상블들의 춤이 그나마 눈을 즐겁게 해줬다.
김소현 스칼렛, 윤형렬 레트, 에녹 애슐리, 정단영 멜라니, 한유란 유모, 박송권 노예장, 벨와트링 강웅곤.
크리칼렛은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초반의 어려 보이는 혹은 통통 튀는 목소리의 노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괜찮아지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대로 1막 마지막 곡에서 아주 멋진 노래를 들려줬다. 초고음에서 갑자기 창법을 바꿔 성악발성을 썼는데 그 변화가 지나치게 급격해서 어색했다. 연기는 생각보다 좋았다. 곰레트는, 이 극을 보게 만든 거의 유일한 이유인데, 능글맞게 스칼렛에게 대사를 치는 연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괜찮아서 깜짝 놀랐다. 원작에서 레트가 스칼렛보다 열 몇살이 많다는 설정이라기에 두 배우가 과연 어울릴까 싶었는데, 극 자체에 그런 큰 나이차가 부각되는 장면이 없어서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녹슐리는 팬텀에서 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여서 깜짝 놀랐다. 듣기엔 좋았는데, 군인 장교인 캐릭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유해서 조금 아쉬웠다. 유모와 벨와트링 배우들의 노래실력이 아주 좋아서 감탄했고, 노예장 배우는 내뿜는 분위기와 몸동작이 훌륭했다. 앙상블 중에 얼굴이 익은 배우 몇몇이 보여서 반가웠다. 군무가 어려워보이긴 했는데, 아직 타이밍이 조금 안 맞는 부분이 있는 건 아쉬웠다. 쭉쭉 뻗는 안무가 아주 많은 여자 앙상블들도 걱정이지만, 여자들을 들어올리는 리프팅 안무가 아주 많은 남자 앙상블들의 허리가 걱정된다. 짧지 않은 기간인데 몸조심들 잘 했음 좋겠다. 아, 가야바를 했던 최병광 배우가 스칼렛의 아버지 역이었는데, 벌써 목소리가 조금 가셔서 안타까웠다. 긴 넘버가 두 곡 이상이면 더블캐스팅으로 갑시다.
※스포있음※
자, 그래서 이 극의 주제가 대체 뭔가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 부딪히고 넘어지고 절망하더라도 새로이 털고 일어나 인생을 살아가자는 건가? 혹은 백인과 흑인, 남과 북, 여자와 남자 등 전혀 다른 두 집단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차이 등을 보여주는 건가? 혹시 계속 어긋나기만 하던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두 사람이 사랑에 대해 깨닫게 되는 열린 결말의 러브스토리? 그것도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바람 때문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인생에게 바치는 헌사? 정말, 진심으로 모르겠다.
죽은 아이를 붙들고 오열하는 레트와 스칼렛을 보며 머릿속을 스쳐간 한 문장이 있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어지간하면 어떤 극이든 보면서 한 번쯤은 눈물을 흘리는데, 세상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듯한 슬픔에 잠긴 두 사람이 안쓰러워보이긴 했으나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굴곡이 심하긴 했지만 부의 정점을 찍고 부유하게 살아왔던 스칼렛의 이야기가 그리 가엽거나 애처롭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심각하게 부족한 탓도 컸다. 흑인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2차대전의 유태인 이야기보다도 훨씬 와닿지 않는 주제다. 거기에 남부 목화 농장의 주인이던 상류층이 살던 삶은 생경함 그 자체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 몸을 파는 여자들이 나오고, 아가씨들과 부인들은 자신들을 싫어할 것이며 여자가 원하는 건 돈 밖에 없다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급작스럽게 비극적인 전쟁의 단편들이 등장하고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거리가 나와 거짓투성이의 스칼렛, 나아가 거짓 가득한 세상을 말한다. 맥락 상 아주 뜬금없고 말도 안되는 연출인 건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난잡함' 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극이었다. 라이센스를 들여와서 한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극이라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상식선 상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쯤 친절을 베풀어도 괜찮을텐데 말이다. 이건 어려운 극이 아니라 산만하고 난해한 극이다.
전쟁 중 남부에서 자선행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레트가 미망인이 된 스칼렛과의 춤을 추기 위해 무려 150개의 금화를 경매를 통해 기부하는 그 장면이다. 무대의 배우들보다 뒤쪽에 걸린 초상화에 시선이 더 많이 간 건 나뿐이 아니겠지. 링컨 초상화인 줄 알고 노예해방과 관련된 미국 정치사를 괜히 아는척 하고 있었는데,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드의 초상화라고 한다. 그 장면 내내 초상화만 보고 있었는데 부끄럽네ㅎㅎ
음악이라도 좋았으면 내가 덜 억울했을 텐데....ㅠㅠ 뮤지컬 넘버가 꼭 웅장하고 화려하고 장엄해야 하는 법은 없고, 가요풍이어도 극과 어울린다면 전혀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왜 이 극에 담긴 넘버들이 그런 가사에 그런 멜로디에 그런 반주여야만 했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배우들 음정도 몇 개 불안불안한 것이 분명히 있었고, 막귀인 나도 마지막 스칼렛과 레트의 듀엣에서 크리칼렛 음정 플랫됐다는 걸 확실히 알겠더라. 부르기 어려운 곡을 쓰고 싶었다면 듣기라도 좋게 만들던가. 그나마 괜찮았던 건, 극을 보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곡.
마이클리 배우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매력을 깨닫게 해준 영상들이다. 이걸 보고 한밤중에 펑펑 울면서 마이클리의 다른 영상들을 찾아 몇 시간 동안 유투브를 헤맸었다. 그리고 마저스 회전문을 돌았지. 곡이 극 초반에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늦게 나온데다가, 애슐리가 헌신적인 남편이었던 것이 아니라 우유부단함의 끝을 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멜라니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 똥차였기 때문에 곡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진 기분이 들긴 했다. 하지만 녹슐리의 노래도 좋았고, 극을 통틀어 감정선도 음악 자체도 가장 유려한 넘버였기 때문에 인상 깊게 기억에 남는다.
지금까지의 리뷰들 중 가장 혹평에 가까운 글이다. 어지간하면 한 번쯤은 볼만하다며 마무리할 텐데, 정말 궁금하다거나 좋아하는 배우가 있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관극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배우들이 성대와 체력을 갈아 넣고 있어서, 후반부로 갈수록 능숙함은 더해져도 컨디션에 따른 기복이 심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쓰루도 그렇고 바람사도 그렇고, 초연 이후 지나치게 빨리 돌아오는 재연은 아무래도 지양해야겠다.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만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커튼콜의 석양키스까지도 별로였던 걸 보면, 그냥 이 극 자체랑 내가 아주 안맞았던 것일수도. 나 무지 후하고 관용적인 사람인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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