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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디큐브아트센터, 2015.10.11 2시 공연
아, 자막해야겠다....ㅋㅋ 팬은 연예인을 닮는다더니 류번복의 미학을 벌써 보고 배웠나보다. (그러니까 지킬 진짜 딱 한 번만 더 해주세요ㅠㅠ) 이렇게 말해 놓고 또 막공주 되면 양도 받고 싶어서 손이 드릉드릉 할 것 같긴 한데, 일단 들고 있던 막공표는 취소했다. 2층은 이제 안 올라갈래......
류정한, 린아, 정상훈. (류동키/세류반, 린돈자, 상훈초)
오늘은 전반적인 극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1층 왼블에 앉았더니 지난 관극 때는 보지 못했던 류동키의 표정과 극의 연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와닿았고, 조금 더 짙은 여운이 남는다.
※스포있음※
라만차에서 가장 인상 깊은 연출은 '색'이다. 침대씬을 보며 새삼 깨달았던 것은, '현실'을 강조하는 까라스코나 안토니아, 그리고 가정부는 모두 푸른 톤의 옷을 입고 있는 반면 돈키호테에게 영향을 받고 '꿈'을 꾸는 산초나 알돈자는 붉은 혹은 노란 톤의 옷을 입고 있다. 돈키호테 자신 역시 붉은 색을 덧댄 옷을 입고 붉은 깃털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극을 통틀어 가장 무대가 밝아지는 무어인 장면에서는, 샛노란 해바라기 밭을 폭넓게 펼치며 보고 있는 사람의 가슴을 따뜻한 희망의 빛깔로 색칠한다. '맨오브라만차'의 상징색 자체가 노란색이기도 하고. 맘브리노의 황금투구 장면에서 비오듯 쏟아지는 길다란 천들의 색깔 역시 빨강 노랑 톤이다. 조명 역시 눈부신 태양빛이 쏟아지는 것마냥 밝다. 반면 한없이 추락하는 절망적인 장면에서는 조명이 청록색이나 어두운 파란색, 혹은 보라색 등 차디찬 이미지의 색이었다. 비극적이고 날카로운 느낌을 강조하여 비현실적인 악몽 속으로 들어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잠시 윤간 장면에 대해서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장면이 지나치게 길고 지나치게 상세하며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의 절정을 찍는 장면이고, 그게 주는 극적인 효과를 인정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과하다. 자첫 관극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장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어두운 지하감옥의 벽을 바라보거나, 천장 조명에 시선을 두며 들려오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불편함을 넘어 많이 불쾌하다. 맨오브라만차를 감히 인생극이라 칭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류배우님이 아니었다면 한 번 관극한 뒤 매끄럽게 잘 만든 극이네, 하고 넘겼겠지만, 회전문을 돌면 돌수록 불쾌감이 누적된다. 과유불급.
다시 연출 이야기로 돌아오자. '색'으로 구분을 지었다는 것 이외에도, 그를 돈키호테로 보는가 아니면 키하나로 보는가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는 캐릭터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분연히 돈키호테의 정체성을 되찾고 모험을 부르짖던 그가 쓰러진다. 알돈자와 산초는 오열한다. 신부님은 송가를 부르지만, 죽은 이에 대한 추모일 뿐이다. 그가 키하나이길 바랐던 나머지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가버리셨네, 라는 탄식과 한숨 그 이상의 제스처가 없다. 같은 공간에서 하나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그들의 태도는, 대체 어떤 것이 현실이었고 어떤 것이 꿈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생경하고 괴이했다. 세류반은 극 초반부터 "같은 것을 보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강조한다. 단순히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넘어서, 인생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단 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말한다. 누가, 어떤 생각이 '옳은' 것인가. 극은 분명한 '정답'을 선언하진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엔딩 임파서블드림에서 까라스코 역을 했던 죄수도 세류반에게 노래를 불러줬겠지. 꿈을 쫓는 그 길을 걸으라 종용하고 적극 응원하되, 그게 유일한 정답이고 옳음이라고 단정짓지는 않는다. 그래서 질문을 받은 관객은 오히려 더 깊은 생각에 잠겨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다 마침내 머리가 텅 비어버리면, 돈키호테처럼 굳게 꿈을 쫓을 수 있겠지.
지난 관극들 중 한 번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돈키호테'가 아니라 '알돈자'라 생각하고 봤는데 꽤나 흥미로웠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 잠겨 빛을 잃어가던 알돈자가, 돈키호테라는 계기를 만나 자신의 내면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중 그가 유도한 시련을 겪고 현실의 벽에 호되게 부딪히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분연히 지긋지긋한 현실의 속박을 털고 일어난다. 거울의 기사에게 속아 쓰러지는 돈키호테를 생생하게 목격한 그가 어떠한 생각의 전환을 맞아 그를 찾아가는지, 극에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현실을 마주한 돈키호테가 극한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재차 절망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꺼내준 그 '희망'을 도와야겠다는 용기와 열망이 타오른 것이 아닐까. 오히려 자신을 꿈꾸게 했던 그를 찾아내어 다시 꿈꾸게 만들고 다시 반짝일 수 있게 만든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깊숙히 묻어둔 무언가를 억지로 끌어낸 것이 '옳은 일'이었다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키하나 자신은 분명 '돈키호테'로 죽을 수 있어서 행복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빠르게 사그라든 그 열정과 꿈과 희망은, 고스란히 알돈자에게 전달되었다. 그가 슬픔으로 얼룩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말한다. "내 이름은 둘시네아예요." 그 후의 이야기는, 어찌됐든 이미 중요치 않다. 알돈자는,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고 받아들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긍정했다.
지금까지는 극 중 극의 이야기였다. 이제 극, 그러니까 세류반에 대해서도 조금만 얘기해볼까 한다. 그가 변론을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형태로 해보이겠다고 선언하고, 죄수들을 가운데로 모은다. 반원형으로 둘러싼 죄수들이 점차 돈키호테로 변하가는 세류반을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감탄을 보내는 동안, 반대편의 관객들 역시 세류반을 중심으로 같이 둘러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라만차의, 돈키호테로!!!"라 외치며 돌아서는 순간,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오는 건 이번 관극이 처음이었다. 다함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중간중간 세류반은 죄수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거나 행동과 노래를 알려주기도 하면서 극을 차근차근 진행시킨다. 자신의 변론임에도 모두를 참여시키며 즐거움, 혹은 그 이상의 뭔가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잔혹한 날 것의 현실을 마주한 세류반은 크게 충격 받는다. 하지만 끝없이 삶을 직시해온 자신의 인생을 말하고,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 강변하며, 돈키호테로 상징되는 '용기'는 극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강조하면서 그는 다시 자연스럽게 극 속으로 녹아든다. 극작가인 그에게 '돈키호테'는 만들어낸 작품 속 캐릭터였지만, 배우인 그에게 '돈키호테'는 바로 그 자신이다. 결국 작가는 작품에 자기자신를 투영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다. 철야기도를 류동키가 아니라 세류반테스의 목소리로 전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뿐더러 더 큰 감동을 주는 이유도, 결국 그 한 구절 한 구절이 세르반테스가 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행하던 철야기도의 마지막 문구 즈음부터 점차 허리를 다시 구부리고 할배의 목소리로 바뀌는 디테일은 류배우님이기에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디테일이라고 생각한다. 1막 마지막 임드와 2막 침대씬, 그리고 커튼콜의 임드만으로도 재관람의 가치는 충분하다. 세류반 목소리가 더 많았더라면 훨씬 취향이었을텐데..ㅠㅠ
음, 류배우님 찬양으로 살짝 샜네. 거울씬을 이야기의 끝으로 생각해두었던 세류반은, '즉흥으로' 마지막 결말을 만들어낸다. 변론에 성공하고 돌려받은 원고를 가슴에 꽉 끌어 안는다. 종교재판을 받으러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두려울 때도, 단호할 때도 있다. 두려움이 큰 세류반은 죄수들의 임파서블 드림을 듣고 용기를 얻는다. 빛을 향해 뛰어가는 걸음이 무겁지만 단단하다. 반면 극을 완성하고 나름의 결말을 지어 단호한 세류반은, 죄수들의 노래에 벅참과 기쁨을 얻는다. 빨라지는 발걸음이 살짝 무게를 덜어낸 듯 희망차다. 어두운 조명으로 세류반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이토록 다른 느낌이라니. 가슴 속에 차오르는 감정도, 그래서 매번 달랐다.
생각했던 이런저런 것들을 한 번에 쓰려니 글이 두서없다. '명작'이란 보는 사람마다 다른 걸 느끼고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뮤지컬 맨오브라만차는 이 정의에 정확히 부합하는 극이다. 같은 시즌에서 겨우 다섯 번 보는 와중에도 매번 다른 장면에 방점을 두고 관극하면서 각기 다른 고민에 잠겼다. 아마 총막 전에 또 보게 되더라도 또 다른 생각을 하면서 세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런 작품이다, 이 극은.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작품이지만, 또 무겁기만 한 극도 아니다. 완벽하다는 찬사보다는, 수작이라는 평과 함께 살면서 한 번은 꼭 봐야 한다는 추천을 남기고 싶다. 어째 극 자체에 대한 리뷰네. 일종의 마무리라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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