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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in LG아트센터, 2015.07.30 8시 공연
관극하지 않으려 했다. 고통스러울 것이 뻔해서. 그래도, 한 번은 봐야만 하는 극이라고 생각해 결국 예매했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역시 보길 잘했다. 필요한, 유의미한 고통이었다.
불친절한듯 친절한 극이다. 1막과 2막을 시작하며 자막으로 간략히 줄거리를 보여주는데, 타겟층을 생각해보면 이해는 간다. 방대한 내용의 원작소설을 2시간 반의 공연에 녹여내는 과정 속에서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겠지. 그래서 말 많았던 LED 같은 연출도 마냥 부정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LED를 붙여놓은 세로선이 상당히 거슬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색감도 좀, 촌스럽더라. 달의 노란색은 그게 최선이었을까...... 그래도 솟대나 흩날리는 수국 꽃잎, 새빨간 혼불 등의 표현을 극 전반에 잘 녹여내 보다 풍성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극 끝나고 찍은 사진인데, 수면 위에 비쳐 출렁이는 글씨가 참 인상적이다. 요동치던 내 감정 같아서 더욱.
※아래부터 스포일러 있음※
이날의 캐스트. 일단 카이 배우와 윤공주 배우를 꼭 보고 싶었다. 서범석 배우도 궁금하긴 한데,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안재욱 씨는 노래를 살짝 걱정했는데, 떼창에서 목소리가 묻히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이외에는 의외로 딕션도 좋고 저음에서 목소리가 참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카이 씨는 너무 도련님 이미지라서 ~하제, 라고 맺는 사투리 노래가 꽤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2막에서는 그새 익숙해져서 풍성한 저음으로 귀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특히 아아- 하면서 가사 없이 배우들이 서로를 잡아먹을듯 부르던 그 장면, 정말 훌륭했다. 가슴 속의 뜨거움이 끓어넘치는 듯한 기분. 윤공주 배우는 연기가 정말 좋았고, 2막에서 절규하는 목소리가 어쩜 그렇게 한스럽고 깨끗하게 쏟아지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2막에서 숨도 못쉬고 속으로 오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수국이가 숯검댕이가 된 어머니 앞에서 '아이고' 하며 곡을 하는 장면이었다. 아녀, 이건 우리 엄니가 아녀, 어머니에게서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땅을 치며 비명처럼 곡을 하는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저 단정히 앉아 있는 검은 상복의 감골댁 김성녀 배우. 너무나도 한국적인 목소리와 노래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고통과 뒤에 남겨져 끝없는 기다림으로 썩어들어가는 '한'의 정서를 아프도록 표현해주셨다. 옥비 역의 이소연 배우도 어찌나 목소리가 훌륭한지. 1막 초반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온갖 감정을 눌러담아 쏟아내듯 창을 뽑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이미 내 눈에서 눈물은 쏟아지고 있었다. 득보의 김병희 배우는 출산하는 수국이의 모습에 "나는 득보 사랑하제-" 라며 높은 음으로 수국이의 파트부터 두 사람의 노래를 홀로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 앞에서 차마 어떤 표정도 지을 수가 없었다. 조연 앙상블도 노래와 안무 모두 훌륭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뜯어보게 되더라. 다들 얼굴 가득 수많은 감정을 싣고 있었다.
이 극의 제목은 '아리랑' 이다. 아리랑은 곧 恨 이다. 恨 이야말로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정서다.
1막에서 독립운동을 중단하고 흩어져 어떻게든 살아남자 결단하는 장면이 있다. 비장한 표정의 송수익 앞에서 민초들은 이럴수록 흥을 내자며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한다. 하나의 목소리는 두 개가, 세 개가 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했을 때 그저 좌절하고 다만 포기하며 쓰러지는 일은, 없다. 흥으로, 결속력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그 고통을 승화시킨다. 恨. 꾸역꾸역 밀어 넣어 가슴에 묻는다. 그리고 웃는다. 웃으면서 노래하고 흥을 돋운다. 웃는데 울고 있다. 흥을 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지독하게 고통스럽다. 속이 갑갑하다. 괴롭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무너진다. 서로를 감싸 안는다. 내 가슴도 같이 무너져내린다.
2막의 마지막 장면. 수국이와 득보의 죽음. 남겨진 자들의 황망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드디어 속박에서 벗어난 그들이 웃는다. 너무나도 맑고 아름답게. 노래 한 곡 뽑아보라는 수국이의 말에 옥비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다. 종이 땡그랑, 땡그랑 소리를 낸다. 상여 위에 올라탄 두 사람을 중심에 두고 모두가 함께 미소 지으며 노래한다. 나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천장에서 수의가 내려온다. 많은, 빛바랜 수의다. 등을 돌린 배우들이 살짝 고개만 돌려 관객석을 바라본다. 차마 그 눈과 시선을 마주칠 수 없다. 먹먹한 가슴 속 응어리가 아프다. 명치를 손으로 세게 눌러보지만 여전히 아프다. 암전. 막을 올렸다 내리는 과정 없이 바로 커튼콜이 시작된다.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 어떤 배우의 얼굴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감정이 추스러지지 않아 막힌 숨을 토해내듯 뱉어본다. 시원하게 웃는 무대 위 그들 앞에서 또 눈물이 터져나온다. 사위의 환호가 먹먹하다.
극을 올리기까지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여러모로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이 극 내내 이곳저곳에 보였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아프고, 아픈 만큼..... 아픈 만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진짜 두 번은 못보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번은 봤으면 하는 극이다.
흰쌀 솎아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팔려' 일하러 간 사람 등등 기존에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역사의 단면들을 보여준 것이 좋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며 그 끔찍한 시절을 꿋꿋이 버텨내던 사람들을 보여줘서 좋았다. 시대를 마주하는 태도의 차이를 명확히 표현해서 좋았다. 곱씹을수록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상징들이 많아서 정말 고맙다. '친절하게' 극 내용을 알려주는 극이지만, '불친절하게' 극 곳곳에 알면 알수록 더 많은 것들이 보이도록 만든 극이다. 정말, 좋은 극이다.
같은 시대를 다룬 뮤지컬들, <꽃신>이나 <영웅>과는 또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극이다. 정말, 꼭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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