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팬텀

in 충무아트홀 대극장, 2015.06.02 8시 공연





별다른 기대 없이, 그냥 한국 초연이라기에 최대한의 할인을 찾아내 무덤덤한 마음으로 예매한 공연이었다. 바쁜 월말월초의 업무를 이겨낸 스스로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생은 역시 예측불가한 것. 벼락같이 내리꽂히며 심장을 부들거리게 만든 찰나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아주 생소한 일이었지만 너무나도 황홀해서 현실감조차 흐려졌다. 맞다. 소위 말하는 덕통사고. 그걸 당했다.





이날의 캐스트. 류정한 배우, 통칭 류팬텀이다. 



무대에서 첫 등장할 때 내가 앉은 좌석 혹은 바로 그 뒷좌석에 시선을 똑바로 두며 노래하던 그 눈길에 압도당해 감히 눈조차 깜박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유명한 배우에 대한 예의치레 정도였다. 카리스마 있네, 정도로 간단히 평하면서 다시 극으로 몰입하고 있는데 다시 그가 등장했다. 오페라극장 지하로 내려온 제라드 카리에르(박철호 扮)와 대사를 주고 받는 그 순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내 표정이 와르르르 무너져내렸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휘몰아치듯 쏟아지는 감정.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진정한 '덕통사고'라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는 깨달음만이 머릿속에 남은 단 한줄기의 이성이었다. 



이 감정을 대체 어떻게 글로, 혹은 말로 풀어낼 수 있을까를 온종일 고민했지만 도저히 묘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말했듯 생전 처음 겪어보는 기분이었고, 기억을 쥐어짜내 떠올린 가장 비슷한 경험은 무려 5년 전의 일이었다. 도쿄여행 중에 뮤지컬 하나를 관람했었다. '이미 덕질하고 있는' 공연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선호하는 배우를 서너명 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뮤지컬이 시작되자, 오직 한 사람만을 눈으로 쫓으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오로지 그 사람만 유달리 빛났고, 다른 배우들에게는 좀처럼 시선이 가지 않았다. 영상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묘한 무언가에게 휘어잡히는 기분을 느끼며 공연 내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후 한동안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고, 지금도 나만의 편린으로 선명히 남아있다. 하지만 역시 이건 이미 덕질하던 배우에게 새삼 항복한 것일 뿐이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세간의 평가와 팬텀 포스터사진 하나만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첫대면한 류팬텀과의 만남과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뜯어보면 두 경험 간의 공통점은 딱 이거다. 극에 완벽하게 몰입한 배우가, 마치 정말로 자기자신인 것마냥 온전히 구축해낸 뚜렷한 색깔의 캐릭터. 의외로 이게 가능한 배우가 많지 않다. 그래서 이게 가능한 배우가 후광 아닌 후광을 받으며 강렬하고 또렷하게 관객의 가슴에 남게 된다.





쓰다보니 뭔가 거창해졌는데, 한줄 요약하면 류배우에게 덕통당했다는 거다. 배우에게 이토록 강렬한 팬심으로 반해보기는 또 처음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공연하는 내내 오로지 류팬텀만 바라보며 섬세하고 세심한 그의 연기에 넋을 놓았다. 이 블로그에 적은 리뷰만 봐도 내가 한 집착하는 연출 덕후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텐데, 정말 이 공연은 연출 같은 건 한 톨도 신경쓰지 못했다. 화려한 메인무대에서 노래하는 크리스틴 말고 그 뒤에서 사랑에 빠진 모습으로 크리스틴을 바라보는 팬텀만이 나의 두 눈 가득히 담겼다. 



류팬텀은 다른 무엇보다 연기의 표현력이 아주 섬세했다. 살짝 치켜올라간 한쪽 어깨라던가 손끝까지 살아있는 손가락의 움직임, 주춤거리는 발걸음, 그리고 소심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정체성이 담긴 말투까지. 게다가 어지간한 연애감정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내 마음까지 뒤흔든 1막 솔로곡의 감정선은, 절절한 신파가 왜 존재하는가를 납득하게 해주었다. 2막에서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인생을 견뎌낸 팬텀의 쏟아져나오는 감정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팬텀은 원작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소설이다. 그래서 극의 내용 자체는 거의 비슷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개하는 근거가 미묘하게 다르다. 특히 각 캐릭터들에게 부여한 성격이 오페라의 유령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유약하고 인간적이며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되 배타적인 팬텀이기에, 그런 팬텀을 이상에 맞게 연기해낸 류정한 배우이기에, 홀린 것처럼 덕통을 당해버렸다. 도저히 한 번만 보고 끝낼 수가 없어서 오늘 시카고 예매취소하고 티키에 가입하고 마지막 티켓팅을 했다. '인생 그냥 망했어ㅠㅠ'라고 체념하기보다는 '이런 무대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후회없이 즐겨야해ㅠㅠ!!!!!!'라는 열정으로 살아보려고 한다. 





인터미션 때 자리(1층 4열)에서 찍은 무대모습이다. 팬텀 리뷰는 최소한 한 번은 더 올라올 예정이므로 여기서 대강 마무리지어야겠다. 류지킬을 보지 않은 과거의 나에게 눈물 한 사발을 선물로 보내며..... 또 만납시다.



'공연예술 > Ryu Jung H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맨오브라만차 (2015.09.16 8시)  (0) 2015.09.19
맨오브라만차 (2015.09.01 8시)  (0) 2015.09.02
맨오브라만차 (2015.08.01 3시)  (0) 2015.08.02
팬텀 (2015.07.19 6시반)  (2) 2015.07.20
팬텀 (2015.06.25 8시)  (0) 2015.06.26
공지사항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