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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레퀴엠
in 정동극장, 2022.12.25 6시
류정한 맥베스, 안유진 올리비아, 정원조 뱅쿠오, 김도완 맥더프, 박동욱 로스, 이상홍 던컨, 이찬렬 맬컴, 정다예 애너벨, 홍철희 캘런, 김수종 경호원. 류맥베스 자다섯.
작년 크리스마스에 이어 이번 크리스마스도 류배우님의 공연을 볼 수 있어 기쁘다. 열흘 만의 관극이었는데, 새로 생긴 디테일이 너무 많아서 이것저것 기억하려고 머리를 굴리다가 도리어 많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회전을 도는데 한 번쯤은 상세한 후기를 남길 필요가 있으니 생각나는 것 위주로 적어봐야지.
"이미 생각이 행동을 앞서고 있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워 표정이 보이지 않는 맥베스의 도입부 독백 목소리가 늘 좋다. 처음으로 예언을 들은 직후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던 맥베스의 눈빛은, 파티 준비 잘해놓겠노라 답하며 돌변한다. 공연 초반에는 "축하드립니다, 왕.. 자님" 하고 의중 있는 망설임을 넣었는데, 이날은 텀 없이 부드럽게 축하한 이후에 예언을 곱씹으며 천천히 물들어갔다. 맬컴 왕자를 "왕으로 가는 길의 장애물" 이라 표현하는 그 냉정한 판단. 당신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며 올리비아를 끌어안는 맥베스의 두 눈 가득 욕망과 야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걱정과 불안을 미소로 감추고 있던 맥베스는, 우리도 모르는 새 왕관까지 넘볼 수도 있다며 너무 예언을 믿지 말라는 뱅쿠오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그래, 그래.." 라고 대꾸한다. 스스로를 멈춰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제 손으로 놓아버린 맥베스는 기어코 던컨 왕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는다. 이날 자리의 시야에서 던컨 왕에게 맥베스가 완전히 가려졌고, 그래서 그를 죽인 맥베스의 피 묻은 얼굴이 주는 시각적 효과가 더 뚜렷했다. 피 묻은 오른뺨에 가져다 댄 왼쪽 손등에 하얀 피가 묻어나고, 이를 흔들리는 동공으로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걸음을 옮기며 핏물을 털어내듯 그 손을 툭 털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하이드처럼 그르렁 거리는 소리와, 칼을 가져가려는 올리비아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는 디테일은 이날 처음 봤다.
"이 소리가 던컨 왕을 깨울 수만 있다면.
제발 던컨 왕을 깨워줘, 제발!"
"지나간 밤은 되돌아오지 않아. 되돌아올 수 없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린 맥베스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괴로워한다. 이 디테일이 서너 차례 반복되는데, 던컨 왕의 시체를 보고 온 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무대 왼편에서 또다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조심스럽게 들어오던 올리비아는 문득 제 손에 묻은 피를 환영처럼 발견하고는 왼손을 품에 넣어 감추면서 맥더프에게 말을 건다. 지나치게 흥분하는 맥베스를 말리기 위해 휘청이며 쓰러지는 척하는 올리비아의 전략에서 <레베카>의 이히가 매번 떠오른다. 무슨 뜻인 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선 맥베스로부터 블루 사파이어를 받아 들고 퇴장하는 올리비아. 이 장면에서 "나다운 게 뭔데" 라는 맥베스 대사 없어졌더라.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
진상을 의심하는 뱅쿠오와 그런 뱅쿠오를 응시하는 맥베스가 무대 안쪽 구조물을 사이에 두고 경계하듯 움직이는 동선을 좋아한다. 특히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무대 왼편의 문 안쪽에 선 던컨 왕이 독백처럼 노래하는 부분에서, 맥베스가 객석을 등지고 그를 정확히 마주하는 순간 "아름다운 것!" 하고 선언하는 연출이 몹시 취향이다. 아들 플리언스도 함께 데려오라는 맥베스의 말에 멈칫하며 살짝 뒷걸음질 치는 뱅쿠오. 홀로 남은 맥베스는 남 좋은 일을 위해 던컨 왕을 죽인 것이라는 마녀들의 목소리에 둘러싸인다. 이 부분은 예언이라기보다 왕위를 물려줄 후손이 없는 자기 자신을 불쌍하다 연민하며 이후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맥베스 내면의 음성으로 들린다. 처음이 어려울 뿐, 이미 더럽혀진 손에 다시 피를 묻히기는 쉽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썹을 치켜든 맥베스는 가볍게 성호를 긋고선 양 손바닥을 붙여 기도한다. 그대로 손깍지를 끼는 것까지는 매번 봤는데, 이날은 그 손을 그대로 입가로 가져가 짧게 키스를 했다. 그들도 영원히 살지는 않는다는 올리비아의 말에 "그것 참 위로가 되네" 하고 비아냥 거리는 맥베스. "가실까요, 왕비님" 하고선 그의 손을 붙잡아 끌다가 먼저 손을 놓아버린다. 대관식. 올리비아가 건배사를 거절하자 이를 악물며 "당신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아 있겠어" 하고 원망하듯 혹은 비난하듯 그를 향해 으르렁댄다. 제 잔만을 빤히 응시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스코틀랜드를 위하여!" 라고 후창 한 맥베스는 술을 마시지도 않고 테이블에 탕 내려놓는다. 총성에 깔깔 웃다가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구기고선 울음 같은 웃음을 토하던 맥베스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또 가린다.
"그 피가 네 얼굴에 묻어있으니 보기 좋구나"
손님 대접이 너무 소홀하다는 올리비아의 비난에 맥베스가 평소보다 날카롭고 냉랭하게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고 외쳤다. 그러나 그가 이내 부드러운 장난조로 "왕비님" 하며 허리를 숙이자, 손님들이 깜짝 놀랐다며 즐겁게 웃는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뱅쿠오를 보고 경악에 차는 맥베스. 그가 제 잔에 가득 담긴 하얀 피를 테이블 위에 쏟아내자 허겁지겁 손에 그러모은다. 이날 유난히 많이 튄 흰 가루가 마지막까지 무대 바닥에 흩뿌려져 있어 좋았다. 테이블 위의 해골과 내장을 보고 높은 톤의 비명을 쏟아낸다.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올리비아의 말에 넋이 나간 얼굴로 "자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제가 병이 있습니다." 하고 변명하는 맥베스의 목소리가 이토록 건조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술을 달라고 손을 내밀며 "술을 마셔야겠어. 그래야 정신을 차리겠지" 하는 중얼거림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건배사를 제안할 때는 거의 울먹였다. 로스가 "건강을 위하여, 건배!" 를 외치기도 전에 혼자 "건배!" 를 외치고 술을 벌컥 마시는 맥베스. 수습되지 않은 파티. 평소만큼 유약하지 않은 맥베스였기에, 퇴장하는 로스를 향해 흔들리는 목소리로 뱅쿠오의 이름을 읊조리는 디테일은 없었다.
"오늘 밤엔 정말 잠을 잘 수 있을까"
뱅쿠오마저 죽였노라는 침묵의 긍정에 올리비아가 경악하자 맥베스는 "다 우리를 위해서" 라고 말한다. "그럼 아까 봤던 게.." 하고서는 "던컨 왕이 아니라..!" 라고 덧붙인 올리비아의 대사가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낸다. 잠을 못 자서 그렇다고, 자고 내일 얘기하자며 자리를 피하려는 그를 붙잡은 맥베스는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가까이 다가간다. "올리비아, 나에겐 당신밖에 없어" 하고 울먹이다가, "사랑해" 하고 속삭이며 강압적으로 키스를 한다. 올리비아를, 아니 스스로를 세뇌하듯 퇴장하면서도 계속 "당신 밖에 없어" 라고 수차례 중얼거리는 맥베스. 그런 그의 뒷모습을 경악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비틀대는 올리비아.
"운명은 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하는 것"
다시 예언을 들으러 간 맥베스. 여기까지 온 것은 너의 선택이었다는 마녀의 말에도,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집착에 사로잡혀 상실해버린 잠을 되찾으려 예언을 갈구한다. 맥더프를 죽여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며 "그래야만 해!" 라고 단정적인 어조로 말한다. 하지만 맥더프의 죽음으로 이 끝 모를 불안이 사라질 수 있을지, 이 악몽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두려워하며 울먹인다. 숲이 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멸망하지 않는다는 예언에 그제야 조금이나마 안도한다. 뱅쿠오의 자손에 대한 예언에 대해서는 대꾸하지 않는 마녀들.
광기에 사로잡힌 올리비아는 지나온 갈림길을 되짚으며 괴로워한다. 고통스럽게 신음을 하며 바닥을 기다가 죽은 제 아이를 발견한 듯 드레스를 끌어올려 품에 안은 그는, 뭐라 입을 떼려는 맥베스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쉿" 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총성. 뒤편의 달이 내려오는 속도와 동일하게 천천히 무너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는 맥베스. 입술을 다문 채 억눌린 잇새로 라크리모사 멜로디를, 장송곡을 허밍 한다.
"내일, 내일, 또 내일.
시간이 천천히 발을 끌어 마지막까지 기어간다"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톤으로 꾹꾹 소리를 눌러 내며 '내일'을 발음하는 맥베스. 잠이 들 수 없는 밤을 저주라도 하듯이, 그 기나긴 밤의 끝에 도래한 새벽조차 달갑지 않다는 듯이. 이를 악문 채 이어가는 독백. 예언에 사로잡힌 맥베스의 절망을 지켜보던 맥더프는 그가 "허락한" 예언의 종언을 실행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가 모두 죽어버린 현실에 그를 버려둔다. 홀로 남겨진 맥베스의 "이 껍데기를 데려가" 라는 대사가 이날은 없었다. 대신 맥베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맥더프가 던진 잔을 집어 들고 술을 한 모금 마신다. 기어코 마주한 종말 앞에서 그는 제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선을 알고 인지하지만 악을 행하는 맥베스의 파멸. 지난 후기에서도 언급했듯, 욕망에 사로잡혀 뒤가 보이지 않을 순간에 이 맥베스가 떠오를 것 같다. 제가 행한 선택으로 잠을 상실한 자. 우정과 존경, 사랑과 배려라는 삶의 모든 가치를 잃어버리고 끝내 죽음마저 강탈당한 이. 고전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벌써 30번째 공연이어서 그런지, 커튼콜의 류배우님은 꽤나 지쳐 보였다. 추워진 날씨에 건강 유의하시고 무사히 막공주를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코 앞으로 다가온 마지막과 부재하는 차기작에 쓸쓸해지는 12월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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