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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앤하이드
in 샤롯데씨어터, 2021.12.19 7시
류정한 지킬/하이드, 윤공주 루시, 조정은 엠마. 류지킬/류하이드 자열둘. 류공조 페어삼공/자셋.
2주 만의 관극이 최애 류공조 페어라서 오랜만에 흥미진진하게 이 극을 마주했다. 원미솔 음악감독은 류지킬 첫공 이후 거의 두 달만에 만난 것 같은데, 초반까지는 배우에게 딱딱 맞춰주는 박자에 비로소 대극장 오케를 듣는다는 감격에 겨울 정도였다. 사골 끝나고 류지킬이 주사기를 허공에 톡톡 움직일 때 뾰로롱 하는 효과음 맞은 게 처음이라구요. 하지만 트랜스 초반에 배우 박자 무시하고 무작정 달려 나가기 시작하더니 2막은 결국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르더라. 컨프롱 안 그래도 힘든데 넘버 초반 반주를 그렇게 달리면 어쩌라는 거죠? 조명도 따라가기 벅차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화룡점정은 웨딩에서의 관악기 삑사리. 믿고 들을 지휘자 한 사람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불만으로 후기를 시작한 이유는, 오케 이외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좋은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두께감 있고 풍성한 톤을 많이 사용하던 류지킬 목소리와, 믿고 보는 공주루시/선녀엠마의 인히쟈 듀엣이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귀가 행복했다. 류지킬/류하이드의 노선 또한 이전 관극과 사뭇 달라서 신선했는데, 특히 '통제'라는 단어가 이야기를 관통했다. 날카롭고 단단한 아닛투로 이야기를 시작한 류지킬은, 이전과 다르게 파사드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알면서도 속는 셈 / 속아주니 잘된 셈" 즈음에 앙상블로부터 몸을 휙 돌리며 고개를 떨구는 등, 자신의 내면에도 존재하는 위선을 인지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예의를 차리고는 있지만 날이 잔뜩 서있는 이사회라던가, 브링힘 내내 도무지 풀리지 않는 딱딱하고 진중한 표정이 본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의 이중성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있는 지킬을 보여줬다.
"나쁜 면을 좋은 면에서 떼어내고 좋은 면을 나쁜 면에서 분리해낸다면,
이 두 부분을 완벽히, 완벽히 통제할 수 있습니다!"
1막 내내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 모션이 많았고, 고집스럽고 오만한 이사회를 등지고 서서 주먹 쥔 왼손을 답답하다는 듯 두어 번 들었다가 내리는 동작도 생겼다. "내면 속의 사악함!" 부분을 긁는 목소리로 부르는 디테일은 그대로였으나, 네이를 선고받기 직전 "하느님 제발" 하고 입모양으로 중얼거리는 건 없어졌더라. 기권하겠다는 댄버스의 말에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것과 글로솝 장군 퇴장할 때 형언하기 힘든 표정으로 그의 움직임을 따라 객석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것도 그대로여서 좋았다. 레드랫 들어가기 전에 앙상블의 풀어헤친 조끼 앞섬을 보고 책망하듯 뭐라고 하는 건 처음 봤다. 브링힘에서 "난 안 그래" 하는 루시 말에 입가에만 살짝 미소를 띄우기만 했고, 이전처럼 피식 웃는 건 없었다. 내내 평소보다 더 무거운 표정으로 "다 똑같아," 하고 중얼대며 고개를 끄덕였고, 넘버가 끝나고 박수는 제일 먼저 쳤지만 "브라보!" 라고 외치지는 않았다.
루시가 만진 제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류지킬은, 다가오는 루시의 키스도 고개까지 살짝 꺾으며 거의 응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이성을 차리며 벗어났다. 오른손으로 명함을 건넬 때, 지갑을 든 왼손을 약혼식 때처럼 등 뒤 허리에 우아하게 올려놓은 것을 이날에서야 처음 봤다. 루시로 인해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마주한 류지킬은, 이 실험의 대상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분리해낸 '나쁜 면'이 제 통제 하에 머무르리라 안이하게 확신하면서. 하지만 위선이라는 답답한 창살을 뜯어버리며 탄생한 그 '악'은 말 그대로 통제가 불가능하게 날뛰기 시작한다. 마음대로 휙 꺾이는 왼팔의 힘에 몸통까지 휘청이며 끌려가고,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붙잡아 제지하려 해 보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힘을 통제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며 난리를 치는 트랜스는 처음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무릎 꿇은 자세로 "제기랄 염병할" 부분을 부르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일어나 "뭐야 넌!" 하고 부르짖는다. 왼손에 이어 오른쪽 손가락까지 바르작대다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에 놀라 경계하는 몸동작도 평소보다 컸다. 팔을 한쪽씩 크게 저으며 방어적으로 경계하다가 휙 뒤돌아 서서 둘러보던 류하이드는 거울을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간다. 붉은 조명을 받으며 무감각한 표정으로 어깨와 등 위쪽 근육을 마치 오그라들어 비틀어내듯 움직이더니, 다시 한번 양손을 한차례 제 의지대로 꿈틀거려 보고선 머리칼을 만지며 묵직한 웃음을 토한다. 그르렁 대는 숨소리를 낮게 한 번 내뱉으며 일지 앞으로 걸어가는데, 거의 펜 근처까지 뻗은 오른쪽 손목을 왼손이 턱 붙잡고는 무겁게 힘을 주며 끌어다가 오른쪽 허벅지 위에 내려놓고 토닥였다. 하이드가 몸 전체를 점령한 것이 아니라, 지킬의 통제를 뿌리치고 억누르는 것처럼.
"내 이성과 내 의지는 어디로 갔나
냉정하게 나의 길을 가야만 해"
히즈웍에서 "내 이성과" 하며 왼손을 내려다보고 "내 의지는" 하며 오른손을 내려다보는 류지킬의 디테일이 새삼 눈에 밟혔는데, 명징했던 이성을 압도하는 비이성을 한탄하고 견고했던 의지를 잃어버리고 있는 현실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해석됐다. "기-도-하-네" 하며 양손을 모아 고통스런 표정으로 기도하는 류지킬 얼굴에서 절망이 뚝뚝 떨어졌다. 치료를 받은 루시가 입을 맞추는 건 지킬의 오른쪽 손등이지만, 루시와 키스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건 왼손이라는 점도 이날 새삼스럽게 인지했다. 루시는 지킬의 선량함과 따뜻함을 동경하지만, 루시를 향한 지킬의 마음은 위태롭고 숨겨야 하는 감정이라는 차이가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나더라.
얼랍1에서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다" 하며 중심부에 손 대고 허리 튕기는 거 여전해서 짜릿했다. 이전에는 몸을 흔들고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조롱을 극대화하던 얼랍2 직전 장면에서, 이날은 자세를 가만히 고정한 채 느릿하고 오만한 목소리로 대사를 이어가다가 "비유가 틀렸어," 하면서 지팡이를 휙 들어 올렸다. 얼랍2에서 강세를 넣는 모든 부분을 사랑하고, 발로 주교의 목을 지그시 누르며 "이빨로 목덜밀 물어" 하고 그르렁 거리는 자세와 표정을 좋아한다. 어떤 찰나도 놓칠 수 없는 류하이드의 완벽한 넘버. 머더머더 디테일은 글로솝 시체를 지팡이로 가리키는 것 외엔 다 유지됐다. 이건 12/4 공연 한정이었나 보다. "선량함 상냥함" 휘파람 그대로였고, "자네의 노력을" 인정 못하겠다고 말했다.
"분명한 건 그 어딘가에 진실이 있다는 거야. 내가 그 진실을 찾기 위.."
원써폰 직전 엠마와의 대화에서 류지킬은 지난 관극까지만 해도 "그 진실을 찾.." 까지만 말했는데, 이날은 "찾기 위(해서)" 라고 조금 더 뒷말을 붙였다. 잘 잡히지 않는 하이드를 통제하려 애쓰는 건 사람들을 구하고 어딘가에 있을 진실을 찾기 위해서라는 류지킬. "거울 속의 김처럼 사라져요" 라며 거울 위에 왼손을 올렸던 것 같은데, 이날은 대사를 다 끝내고 넘버를 시작하기 직전에 거울 하단 틀에 양손을 퍽 내리쳤다. 하이드가 제 내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기에 차마 그를 미워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울음기를 걷어내고 두텁고 질감 가득한 음색의 목소리가 이 넘버의 감정선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댄져.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라는 디테일 유지. "내 어깨 위로" 라는 루시의 목소리 끝에 그의 왼쪽 어깨 위에서 하아아, 하고 숨소리를 불어넣는 건 계속 있었는데, "내 모든 걸 알아" 라며 눈을 질끈 감는 루시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또 한 번 하아아, 하고 육성에 가까운 숨소리를 토해내는 건 이날 처음 봤다. 몸을 숙여 루시의 다리를 탐욕스럽게 훑던 류하이드가 오른손을 루시의 머리 위쪽으로 뻗으며 그를 붙잡으려 드는 동작도 처음 봐서 기함했다. 이전 공연에서는 루시가 제 손길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뒤로 걸어갈 때 낮은 웃음소리를 토했었는데, 이날은 "나도 몰랐던 나" 하는 마지막 소절 끝에 하하하, 웃고서는 그 뒤에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인사도 없이 여길 떠나려고?"
루시가 떠나려는 것이 하이드 자신이 아니라 비참한 현실만이 있는 바로 '이곳'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류하이드의 대사. "넌 아무 데도 못가" 하고 으르렁대며 루시에게 선고를 내린다. 침대 위에 앉아 "가까이, 더 가까이, 더, 더" 하는 류하이드의 명령에 잔뜩 겁에 질린 채 애써 공포를 감추며 공주루시가 바싹 붙어 앉는다. 원래 루시에게는 따뜻한 색감의 조명이, 하이드에게는 초록빛의 냉랭하고 섬뜩한 색감의 조명이 닿아야 하는데,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루시의 조명이 하이드의 조명을 삼켜버렸다. 그래서 루시를 죽이려 칼을 꺼내드는 류하이드의 얼굴빛이 시체처럼 번뜩이는 대신, 루시처럼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의 피부처럼 빛났다. 루시의 목을 그은 칼을 객석을 향해 치켜든 하이드 안에서 튀어나온 류지킬이 "미안해 루시," 라는 추가된 디테일은 이날 처음 만났다.
로인닥맆. 울먹이며 들어와서 첫 소절을 부르고선 휘청하며 조명에서 살짝 벗어날 정도로 뒷걸음을 치는 류지킬을 보고 이날의 컨프롱도 하이드가 강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컨프롱 내내 류지킬은 류하이드와 비등하게 대립했다. 오른손을 슬쩍 쓰던 류하이드는, 평소 양손으로 본인 가슴팍을 퍽 내리치던 "니가 죽어도 나는 살아" 라는 소절에서도 왼손만 쓰며 '나'를 강조했다. 꼿꼿이 서서 오른손으로 앞쪽을 가리키며 노래하던 류지킬이 "난 너를 죽이고! 웃음질 테다" 하며 왼손까지 들어 올리며 양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냈다. "공존은 불가능해" 하며 앞섬을 팍 풀어헤친 뒤에도 헥헥 숨을 몰아쉬지 않고 바로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모습에, 이날 류지킬이 얼마나 단단한지 절감했다. 마지막에 하이드가 "그럼 지옥에서 만날까 지킬-!" 하는 대사도 이전과 완전히 달라서 신선했다.
류지킬은 이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예민하며 이성적이었고, 류하이드는 한층 낮고 음산한데도 기묘하게 인외적인 인상이 덜했다. 통제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고는 있지만, 지킬이라는 근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하이드였다. 지킬이 절대선이 아니었듯 하이드 역시 절대악은 아니라는 점이, 어딘가 음울한 지킬과 인간의 무언가가 남아있는 하이드를 통해 표현되어 상당히 흥미로웠다. 웨딩에서 하이드가 튀어나오는 장면도, 이전에는 지킬을 찍어 누르며 단숨에 육체를 점거했다면 이날은 하이드라는 본능이 지킬이라는 이성을 밀어내면서 물 흐르듯 몸을 차지했다. 엠마의 목을 조르는 건 하이드의 오른손이었고, "당신은 날 해치지 않아요" 라는 말에 눈동자가 뒤집히며 머리를 흔들다가 그의 팔을 붙잡는 건 지킬의 왼손이었다. 마지막 순간 "어서요," 라고 어터슨을 재촉한 류지킬이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붙잡고 힘겹게 내리는 동작은 얼랍1 직전에 하이드가 지킬을 제지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전체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관극이어서 후기가 길어졌다. 남은 12월 회차는 하루만 빼고 다 갈 예정이기에 벌써부터 설레고 신난다! 노선을 바꿔내고, 그 변화를 쌓아 올린 디테일로 풀어내는 류배우님 덕분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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