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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in 디큐브아트센터, 2019.11.06 8시
김소향 마리 앙투아네트, 장은아 마그리드 아르노, 손준호 악셀 폰 페르젠, 민영기 오를레앙, 김영주 로즈. 이하 원캐.
우리가 꿈꾸는 정의는 무엇인가. 수없이 많은 예술작품으로 끝없이 회자되고 해석되며 거듭하여 재창조를 거쳐온 인물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룬 이 극은, 정의를 핵심 가치로 짚어낸다. 마리 한 사람에 온전히 치중하는 일대기적 구성 대신, 그 시대 안의 여러 인간 군상들을 담아내며 역사의 큰 줄기를 훑는다. 제작사 EMK의 극은 모두 고전이라는 원작이 있거나 실존 인물이 존재한다. 대극장의 여러 특성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나, 이야기의 근원이 존재하는 만큼 그에 따른 한계도 존재한다. 이 제작사의 여러 뮤지컬들을 마주하며 느낀 가장 큰 문제는 극이 던지는 화두에 깊이가 없다는 것이다. 원작의 묵직함을, 실재한 삶의 맹렬함을, 그 과정에서 끝없이 되물었던 질문들의 함의를, 단순하고 밋밋하게 다듬어 장식처럼 소비한다. 연출을 조금만 바꿔도 훨씬 단단해질 여지가 분명하기에 극의 얕음이 한층 부각된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앞세우는 건 전략이지만, 알맹이 없이 껍데기에만 치중하는 건 태만함이다. 조금 더 깊이 고민한다면 이 불편함을 완전히 지울 수 있으리란 생각이 반복적으로 들어서 매번 아쉽고 화가 난다.
이 극에서 특히 불쾌했던 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창녀" 라는 호칭이었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을 조롱하고 격하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천박하고 직설적이며 질 낮은 어휘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는 당연하다. 실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가해진 멸칭 중에 "오스트리아의 암캐" 라는 표현이 있었고, 이는 극 중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성에게만 부여되는 저 비하의 용어를 극 내내 주입시키듯 되풀이할 필요는 결코 없었다. 떼창마다 수없이 반복되는 저 단어가 너무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다. 일전 리뷰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작중 배경이 과거일지라도 작품이 올라오는 시점은 현재다.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는 연출가와 제작자는 작품을 올릴 자격이 없다.
이 극은 혁명을 이끌어내는 과정이나 그 안의 군중들의 모습을 세련되거나 우아하게 포장되지 않고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배척과 광기와 불신과 분노가 팽배한 집단 속에서 한낱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여실히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비극을 한층 극적으로 표현한다. "내 몫의 운명" 을 마주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변화와 멀리 있을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마주하며 흔들리는 마그리드의 감정이 점층적으로 쌓인다. 비난하고 경멸하고 저주하였으나, 실은 같은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고, 연민하고 동정하며 공감하고, 끝내 용서하여 위로와 연대로 이어지지만, 격동하는 사회의 변혁에 휩쓸린 개개인들은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끝끝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는 고결함이 아름답고 찬란하다.
커튼콜에서 장마그리드가 먼저 인사한 뒤 향마리를 잠시 기다렸다가 두 사람이 같이 손을 꽉 붙잡고 다시 한 번 객석에 인사를 하는데,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대극장에서, 두 여성이, 주연 배우로써, 커튼콜의 마지막 인사를 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지금껏 여주원탑극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극장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여성들이 명백한 주연으로써 무대에 함께 존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서로의 손등에 깊이 키스하고, 상대를 꼭 껴안으며, 함께 완성시킨 극의 여운을 나누고 위로하는 그 모습이, 황홀할 정도로 짜릿하고 벅찰 정도로 감사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의 성별이 남성 뿐이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더 많은 무대에서, 더 다양한 극 안에서, 저마다의 삶을 내보이는 여성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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