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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Musical

벤허 (2019.09.13 8시)

누비` 2019. 9. 14. 12:59

벤허

in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2019.09.13 8시

 

 

 

 

한지상 유다 벤허, 박민성 메셀라, 린아 에스더, 이병준 퀸터스, 임선애 미리암, 이지훈 어린 티토. 이하 원캐.

 

 

공연이 너무 좋으면 말도 글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장면마다 감탄과 전율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세세한 디테일은 휘발되고 오로지 그 짜릿한 카타르시스 만이 잔상처럼 남아 잠 못 이루는 밤을 선사한다. 이토록 훌륭한 공연을 놓치지 않았다는 기쁨과,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아우르는 벅찬 생동감을 만끽한 행복에 젖어 밤새 감정을 곱씹게 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레전공. 회전을 돌아도 만나기 쉽지 않은 바로 그 레전공을, 벤허 재연 자체첫공 관극에서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다. 이대로 이번 시즌을 자체막공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만족해버렸다.

 

 

 

 

※스포있음※

 

 

골고다. 오버츄어부터 커튼콜까지 완벽한 공연이었지만, 감히 단언컨대 골고다가 최고였다.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을 망연히 바라보며, 한벤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울먹임을 섞어 나지막하게 "그 분을 만나봐야겠어," 라고 말한다. 정신 없이 회전무대를 걸어 십자가를 진 그 분을 따라잡은 한벤허는 묻는다. 이 꼴이 당신이 바라던 모습이냐고. 십자가를 지고서 조롱을 받으며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느냐고. 의문과 노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끝내 절박함이 실린다.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을 향해 대답을 갈구하는 한벤허의 눈빛이 공허하게 이글거린다. 군인들의 제지를 뿌리치며 여기 당신의 군대가 있으니 스스로 왕이노라 말하기만 하라고, "제발 한 마디 말이면 충분해," 하며 기도하듯 양손을 모은 채 검지 하나를 들어올리고 간청한다. 거의 바닥을 기듯이 그를 따라가며 당신을 구하고 우리를 구원하라 애원한다. 그분 대신 십자가를 짊어맨 한벤허가 고통스럽게 걸음을 떼며 묻는다. 이 분노와 이 눈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닐 것이라고. 저들을 죽도록 죽이고 싶다고. "왜!!!" 하고 락발성으로 비명 같은 고음을 토해낸 한벤허는 무너진다.

 

 

지쳐버려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그에게 그분이 다가온다. 무언가 속삭이는 말에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린다. 방금 귀에 들어온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눈빛이,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깨달은 찰나의 일렁임으로 번져나간다. 다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비척대며 걸어가는 그 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주저 앉은 그 자세로 휘청인다. 마치 제 길고 고단한 삶 속의 연결고리를 찾았다는 듯, 허망한 표정으로 1막 그 장면에서 제가 물을 받아마셨던 무대 중앙 쪽을 향해 팔을 들어올린다. 지독히도 지쳐버린 몸은 그대로 다시 바닥에 툭 떨어진다. "저들을 용서하라," 라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분의 말씀을 되풀이하는 한벤허의 온몸에서 형용할 수 없는 절규가 뿜어져 나온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저들은 자신들이," 라고 말한 한벤허는 하하, 하며 허탈하고 비통한 웃음을 토해낸다. 그런 저들을 용서하라는 거냐, 한벤허는 하늘을 향해 묻는다. 그럼 대체 나는 뭐 때문에 그 많은 수난과 고통을 받고 여기에 있느냐, 재차 묻는다. 무대 앞쪽 정중앙에 선 한벤허는 가슴속에 휘몰아치는 모든 감정을 낱낱이 불살라버리는 눈빛으로 마지막 물음을 토한다. "이 가슴에 사무친 칼은 뭐였!!!던!!!!!!!!가-" 라고. 이 부분의 변주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여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대로 무너져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는 한벤허에게 어머니가 다가온다. 그 모습을 발견한 한벤허는 하늘을 바라보며 울먹인다. "이젠 헛것이 보여요," 라고. 절망에 휩싸인 채 울음과 광소를 섞어내며 "내 어미와 내 누이는 문둥병에 걸렸단 말이다," 하고 처참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양손으로 양귀를 틀어막으며 "헛것도 들려요," 하고 울상짓는다. 마치 유아퇴행을 한 것처럼 바닥을 기면서, 한벤허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어머니를 향해 "오지마라," 며 뒷걸음질친다. 가까스로 그 손이 제 얼굴에 닿자 한벤허는 깨닫는다. 헛것이 아니었음을. 체념의 끝에서 마주한 희망을 끌어안으며 한벤허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로마 결투장에서 어머니와 누이의 부고가 담긴 전갈을 받아본 이후로 끝없이 제 운명에 의문을 던지며 일렁이는 눈으로 문득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벤허는 마침내 용서를 이해한다. 전 재산을 싣고 로마로 떠나는 배의 갑판 위에서, 한벤허는 1막 마지막 로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불렀던 운명을 다시 노래한다. 망연하게 운명의 의미를 갈구했던 과거에서 스스로 운명을 택해 걸어가는 미래가 대비되는 엔딩.

 

 

 

 

다른 장면들도 훌륭했으나 글로 엮어낼 수가 없다. 재연에서 훨씬 좋아진 성셀라가 잘생긴 외모와 성대를 자랑하며 붉은 망토를 휘두를 때마다 내적 감탄을 던졌다. 나 메셀라 넘버 과거 장면에서 처음으로 제 칼로 사람을 찌른 순간, 날붙이로 살을 파고드는 그 생경한 감촉에 양손을 파들대다가 얼굴에 튄 뜨거운 피에 몸서리치며 한손으로 닦아내는 디테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린스더는 훌륭한 노래에 적절한 감정선이 잘 담겨서 듣기 편했다. 우물씬에서 당장에라도 어머니에게 달려가려는 한벤허를 손짓으로 진정시키는 디테일이 여러번 있었는데, 덕분에 벤허와 에스다의 감정들이 한층 극적으로 다가왔다. 온몸을 불사르는 앙상블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다. 장면마다 인물에 맞게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며 여러 번 감탄했다.

 

 

초연을 두 번 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재연으로 돌아오면서 어떤 것들이 바뀌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대사로 처리하던 부분이 노래가 된 점은 몇몇 눈에 띄었는데, 그로 인해 아쉬운 점들이 있긴 하다. 예를 들면 2막 전차경주 직전의 벤허와 메셀라의 대화. 초연에서 "대체 왜 그랬니?" 하는 물음에 메셀라가 "너랑 같은 이유," 라고 답하자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뭐?" 라고 되묻는 은벤허 디테일을 아주 사랑했기에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참고) 그런데 재연에서는 이 부분을 노래로 처리하면서 메셀라가 너도 알지 않느냐고 대답하더라. 그리고 2막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두 눈 앞에 있는 이들이 헛것이 아님을 깨달은 벤허가 "어머니!" 를 부르는 것도 초연에서는 대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재연은 그 부름을 노래로 처리해서 감정이 깨졌다. 직전까지 오열을 속으로 꾹꾹 삼켜내며 눈물을 쏟고 있었는데, 음정 위에 어머니라는 호명을 얹으니 몰입이 훅 떨어졌다. 이외에도 이것저것 바뀐 것 같은데 초연이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으니 생략한다.

 

 

 

 

공연을 많이 보다보니, 배우 본체의 전작품들을 가끔 떠올리게 된다. 특히 이 극처럼 연출가가 같다거나, 내용의 유사성이 강한 작품을 만난다면 더더욱 그렇다. 관극 내내 JCS가 어찌나 그립던지. 오버츄어의 나레이션부터 메시아 언급이 나오는 순간마다 지크슈가 떠올랐고, 이는 예견됐던 대로 골고다에서 정점을 이뤘다. 벤허의 절망과 절규가 너무나 강렬했지만, 그 너머의 짘슈 한유다가 스치듯 겹쳐보여서 자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유다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가롯 유다가 아니라 유다 벤허가 왔다며 농담처럼 얘기했는데, 결국 한벤허에게서 한유다를 마주하고야 말았다. 게다가 발성이나 톤까지도 2015년 그 당시의 카랑카랑함과 시원시원함을 고스란히 가져왔기에, 관극 내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 퀀터스를 구하고 뗏목 위에 서서 저기 배가 다가오고 있다, 는 대사를 치는데 그 맑고 선하고 명징한 울림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이외에도 앙상블들에게 한 명씩 눈을 마주쳐주는 디테일이나 로마 군인의 옷을 입고 뛰쳐들 때의 목소리 등이 심장을 후벼팔 정도로 취향이었다.

 

 

이외에도 로마 군인에게 얻어맞고 강제로 무릎 꿇을 때는 나폴레옹 지뢰를 밟았고, 하얀 반바지만 입고 갑판을 오르는 장면에서는 프랑켄슈타인 지괴가 떠올라서 마음이 미어졌다. 로마 결투장 의상도 지괴 같은데, 마지막 상대가 하필 재랑켄에서 추바야를 했던 김선 배우여서 더욱 프랑켄이 떠올랐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벤허가 너무 좋아서 극 자체의 집중도는 아주 높았다. 한지상 배우의 공연은 대부분 만족하면서 나오는데, 이토록 강한 극호는 오랜만이어서 행복하다.

 

 

 

 

1막 운명 넘버 마지막에 "심판하리라," 하면서 오른주먹을 꽉 쥔 채 팔을 치켜들고 마지막까지 음을 뽑아내는 한벤허의 표정이 여즉 생생하다. 꽤 많은 작품에서 만나온 배우임에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그 번뜩이는 광채가 말을 잇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커튼콜에서 마지막으로 운명을 부를 때, 무대 좌우를 왔다갔다하며 호응을 유도하다가 마지막에 빰! 하는 오케에 맞춰 어퍼컷을 하듯 높게 오른팔을 휘두르는 순간의 번뜩이는 안광도 너무 좋았다. 레전공을 마주한 관객의 열광적인 환호와, 그 레전공을 만들어낸 배우의 뜨거운 전율이 맞부딪히는 생생함은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기에 매번 공연장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래서 연뮤덕질을 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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