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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17.10.25 8시 공연
박은태 유다 벤허, 최우혁 메셀라, 안시하 에스더, 이희정 퀸토스, 이윤우 티토. 은벤허, 우셀라, 시하에스더, 희정퀸토스. 은우 페어. 벤허 자둘자막. 큰 부담 없이 은벤허에게 집중한 관극이었다. 은벤허 목상태가 베스트는 아니었지만, 감정이 짙고 맹렬하여 모든 장면들에 오롯이 몰입할 수 있었다. 애초에 목이 조금 안 좋다고 넘버 퀄리티가 떨어지는 배우가 아니기에, 관객으로서도 큰 부담 없이 그저 감탄과 감동을 거듭하며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주연 배우는 물론이고 앙상블들이 워낙 열과 성을 다해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해준 덕에, 공연 내내 벅차오르는 두근거림을 만끽했다.
※스포있음※
1막부터 모든 장면에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은벤허의 맑고 선한 얼굴을 보며 그의 가혹한 운명에 같이 빠져들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3년 1개월의 시간을 버텨내며 살았던 그가 망망대해 위 나무뗏목 위에 서서 "오랜만에 별을 보는 것" 에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자신을 구한 것을 후회하지 않겠냐는 퀸토스의 물음에 흔들리던 눈빛, 피를 봐도 아무렇지 않다며 정말 로마인이 되었다는 자조, 우승 직후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토해내는 울음 같은 고함을 거쳐내며 단정한 옷에 침잠한 눈빛으로 곧게 '로마인' 의 자태로 서게 된 은벤허. 그가 에스더와 티토, 다른 유대인들을 만나고 카타콤을 노래하며 다시 수 년 전 본연의 색을 되찾으려 할 때, 양아버지 퀸토스를 배신자 메셀라의 사주로 잃고 만다. 암살자의 입에서 나온 메셀라란 이름에 저주스런 운명을 향한 부인과 절망이 스친 뒤 망연해진 그 눈빛. 바로 이 지점부터 은벤허는 비틀리고 망가졌다.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허망함을 딛고 일어설 유일한 길은 완전한 폐허 위에 새로운 의지를 처음부터 쌓아올리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2막 초중반 그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눈빛이 서늘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머니와 동생의 행방을 알려주겠다는 메셀라의 덫에 걸려 마치 삶의 의미를 되찾은 듯 일렁이는 분노와 배신감, 증오로 휩싸인 채 맹렬한 기세로 타오른다. 은벤허의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했냐는 물음에 "너랑 같은 이유" 라고 대답하는 메셀라. 그 예기치 못한 대답에 잠시 멈칫하다 "뭐?" 하고 어이 없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던지는 되물음 속에 담긴 감정이 무척 선명했다. 결국 마차 경주는 이겼으나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이 허망하게 죽어버린 배신자를 눈 앞에서 보고, 문둥동산을 찾아 절규하듯 이성을 잃고 헤매는 은벤허가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에스더의 설득에 결국 우물 뒤로 제 몸을 숨기며 어머니에게 아는 척을 하지 못한 은벤허가 양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꺽꺽거리며 숨 넘어가는 울음을 어떻게든 삼켜내려 하지만 결국 신음 소리가 미세하게 비어나왔다. 그 애틋함과 절망이 너무도 어둡고 묵직하여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골고다. 몇 줄의 글로는 담아낼 수 없는 온갖 감정의 색감이 휘몰아치다가 하나로 모아져 공간을 찢어낼 듯 폭발한 뒤 고요히 침잠한다. 지크슈의 겟세마네와는 또다른 질감의 분노와 저항, 절박함과 절규, 절망과 고통이다. 보다 처절하고 인간적인, 그저 운명이 휘두르는 대로 속절 없이 나부껴야 하는 유약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골고다의 은벤허가 숨이 멎을 정도로 좋았다. 중간에 "유대의 왕이 명령하노니" 하고 노함과 간절함을 섞어 빠르게 부르고 "예루살렘아!" 하고 토하듯 부르짖고서는, "칼을 들어라" 는 단호하고 강렬한 명령톤으로 대사처럼 내뱉었다. 넘쳐흐르는 감정을 풀어내는 바로 이 공연이자 오직 그 순간만의 디테일이어서 정말 좋았다. 하늘을 향한 삿대질과 왜? 라고 여러 차례 고통스럽게 묻는 목소리에, 멘탈이 갈리다 못해 가루가 된 벤허의 심정을 절절하게 공유했다. 무대 하수에서 등장한 멀쩡한 모습의 어머니를 발견하고선 "ㅇ...어....ㅁ...ㅓ.." 라며 부름을 채 잇지도 못하고 기쁜 듯 놀란 듯 웃으려다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 꿇고 엎어져 있는 그 자세에서 고개만 홱 돌리며 하늘을 쏘아본다. 그 형형한 눈빛으로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짓씹듯 문장을 시작하지만 "문둥병에 걸렸단 말이다아아악!!" 하고 절규 같은 고합을 내뱉는 기세가 압도적이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믿지 못하다가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하고 온 품으로 끌어안고 나서야 그들의 실재를 실감하며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은벤허. 모두를 끌어안은 그의 "감사합니다" 라는 마지막 탄식이 곧장 암전으로 이어지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1막 마지막 넘버 운명과 2막 마지막 운명맆 하이라이트에서 오케의 쾅, 소리에 맞춰 오른손을 쾅 내리치는 은벤허 디테일이 매번 짜릿했다. 이날 은벤허는 '운명' 이라 적고 '절망' 이라 읽는 비극과 고통으로 인해 하나의 인생이 망가져가는 흐름을 소름끼칠 정도로 설득력있게 풀어냈다.
벤허 재연도, 올라오겠지. 배우들이 바닥을 박박 기면서 절규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사랑하지만, 이 취향만으로는 극 자체에 대한 애정이 차오르지 못한다. 이 소재와 원작 자체가 지금 시대에 맞게 바뀔 수 있을까 의문이 들고 그래서 재연에 대한 회의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아예 내치기에는 아까운 극이라는 생각은 든다. 언제쯤 대극장에서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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