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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 bbch홀, 2019.08.11 6시반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김용한 크리스티앙. 이하 원캐. 재연 류라노 첫공이자 자첫.
초연을 사랑했던 관객으로서, 아주 많이 바뀌리라 예고된 재연을 편하게 기다리기는 쉽지 않았다. 사전에 풀린 포스터의 분위기나 변경된 가사들의 뉘앙스, 라이브 연주의 부재 등이 우아하고 세련된 초연을 지나치게 가벼운 재연으로 둔갑시킬까 두려웠다. 차곡차곡 누적되던 막연한 섭섭함의 해결책은, 간단하지만 어려운 생각의 전환뿐이었다. 초연과 재연은 완전히 다른 극이다. 시라노가 전하는 메시지나 극의 주제는 동일하겠지만, 표현방식이나 구성은 동일할 수 없다. 인정을 하고 나니, 재연 첫 관극을 시라노와의 재회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예기치 못한 유쾌함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수정되거나 추가된 장면들에 신선함을 느끼기도 하고, 무엇보다 바뀐 서사에 따른 류라노 노선에 완벽히 취향을 저격당하고 왔다. 연출이 달라져도, 디테일한 설정에 차이가 있어도, 그는 여전히 시라노였다.
바뀐 가사와 대사, 동선과 연출 등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자둘 이후로 미뤄두고, 자첫 후기는 날 것 그대로의 감상을 간략하게 남겨보려고 한다.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된 록산의 면모, 고작 추임새나 호응을 넣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함께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여성들 덕분에 재연의 첫인상은 초연보다 만족스러웠다. 물론 가스콘 등 주요 넘버는 남앙만으로 진행된다거나, 2막 록산의 행동들이 끝내 주체적인 결말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등의 한계는 여전했다. 그러나 재연의 여성들은 밥을 차려주거나 위로가 되어주거나 유흥거리에 불과했던 주변인이 아니라, 펜을 들어 저항시를 쓰고 칼을 들어 맞서 싸우며 수레를 끌어 전쟁터를 뚫는 중심인물이 됐다. 과거를 답습하는 쉬운 길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를 담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쉽지 않은 길을 택한 것만으로도 재연의 변화는 충분히 유의미하다.
이러한 변화가 반영된 여러 장면들은 초연에 비해 단순 명료하고 직관적이다. 권력자에게 대놓고 아부를 떠는 위선자의 연극, 귀족을 향한 적나라한 비난, 당대를 살짝 빗겨 나는 현대적인 어휘, 편지나 대화의 행간으로 담아냈던 서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의 삽입, 격렬한 전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연출 등이 대표적이다. 초연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은유적이고 시적인 문장들을 포기한 재연은, 재미와 유쾌함에 방점을 두며 극의 진입장벽을 낮췄다. 초연이 선사했던 화려한 언어의 향연을 때때로 몹시 그리워하겠지만, 완연한 차이를 보이는 재연의 텍스트도 곧 익숙해지리라 믿는다. 늘어지는 만담이나 과한 유행어 몇몇을 제외한다면, 퓨전 극처럼 적당히 현시대를 섞은 이 시도가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초연에서는 고상하고 현학적이며 우아함이 가득했던 인물들이, 재연에서는 훨씬 담백하고 인간적이며 명쾌한 성정으로 거듭났다. 시를 읽고 낭송회에 참석하던 록산은, 직접 여성지를 내고 검술을 연마하는 진취적인 여성이 됐다. 언변만 다소 부족했던 영리한 크리스티앙은, 해맑고 미숙한 모습에서 점차 성장해나가는 청년으로 바뀌었다. 드기슈는 초연과 다르게 출신지를 강조하는 대사를 통해 가스콘과의 동질성을 높였다. "건방지지 않으면 가스코뉴 출신이 아니죠!" 라며 건방지고 콧대가 높았던 가스콘 부대는, 별 것 아닌 이유로 서로 드잡이까지 하는 등 시끌벅적하고 무질서하지만 끈끈하고 고집 센 집단이 되었다. 언급한 대사를 재연에서 삭제한 것이나, 세련되고 단정하던 초연 의상을 투박하고 거친 재질과 형태의 의상으로 바꾼 것 등이 가스콘의 성격 변화를 명확히 드러냈다. 바뀐 가스콘의 분위기는 시라노의 성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장면에서 낙엽에 대한 단상을 읊는 대사가 시적인 비유에서 허망한 자조로 변경됐는데, 이는 완고하고 꼬장꼬장한 돈키호테적 면모를 강조했다.
대장과 평대원 사이에 전설 같은 존재로 속해있던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의 시라노는 책임과 부담을 짊어진 대장으로써 직접 가스콘을 이끈다. 초연은 가벼운 위치에서 묵직하게 침잠하며 홀로 고독을 마주했다면, 재연은 무거운 위치에서 곧게 걸으며 굳건히 고독을 바라본다. 초연에서는 브링미자이언트나 얼론, 순앤가스콘 도입 등에서 시라노만 온전히 홀로 남겨졌지만, 재연에서는 가스콘 부대원들이 무대 뒤편이나 옆쪽에 함께 서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혼자이기에 더욱 강조되는 외로움과 다른, 군중 속이기에 훨씬 처절하게 느껴지는 고독. 인물의 입지가 약간 변한 것만으로도 상황과 상태와 감정의 색감이 완전히 달라졌다. 류라노는 초연의 시라노가 끌어안았던 고민과 번뇌를 고스란히 가지고 오는 동시에, 고독과 슬픔과 절망 등의 제반 감정을 더 세밀하게 분석하고 해석을 부여했다. 동일한 단어로 명명되는 감정들이 전혀 다른 질감으로 표현되는 순간, 익숙한 이야기가 다시 새로워졌다.
류라노의 상세한 노선과 디테일은 다음 후기로 미루고, 하나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재연은 별보다 달을 강조한다. 별똥별이라는 단어만 몇 번 나오고, 초연 때 별이었던 가사들은 전부 달로 바뀌었다. 특히 '달나라' 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시라노의 이상향으로써 존재한다. 1막 가스콘 직후 돈키호테를 언급 장면에서 풍차의 날개가 자신을 달나라까지 올려줄 수도 있다는 대사나, 달떨나 넘버에서 자신이 달나라에서 떨어졌으며 돌아가게 해달라는 가사, 그리고 엔딩 장면에서 달나라로 들어갈 때를 언급하는 것 등이 이를 뒷받침했다. 정확한 워딩과 함께 추후 후기에서 다시 한 번 다뤄보고 싶다.
결론적으로 시라노 재연은 서사와 개연성은 초연에 비해 탄탄해졌으나, 연출적인 부분의 변화나 부재는 약간의 아쉬움이 없지 않다. 가령 2막 전쟁터에서 편지와 관련된 록산의 대사는 불필요하게 느껴졌고, 이외에도 설명을 돕기 위해 새로 삽입된 대사나 효과음 등이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단순화된 무대 구조물이나 소품, 조명 연출 등은 자둘 이후에 더 다뤄볼 생각이다. 다만 초연에는 없었던 회전 무대의 활용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는데, 특히 2막 스포씬이나 가스콘맆 엔딩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8개월 만에 만난 무대 위의 류배우님은 늘 그러했듯 눈부시게 경이로운 공연을 선사해주셨다. 황홀한 목소리와 사랑해 마지않는 연기를 마주한 기쁨이 너무나 커서, 오버츄어 첫 음부터 커튼콜까지 펑펑 울고도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어셔가 내보낼 때까지 객석에 남아 쏟아내던 눈물은 로비에 나와서도 한참을 멎지 않았다. 행복함에 벅차오르는 이 마음이, 커튼콜에 울컥하신 류로듀서의 마음과 일맥상통 했으리라 생각한다. 너무 뵙고 싶었어요, 배우님. 재연 류라노가 딱 20 회차니까 초연만큼만 볼게요. 자둘은 본공 첫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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