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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미나우

in 충무아트홀 블랙, 2017.05.10 8시공연



킬미나우 재연. 이승준 제이크, 윤나무 조이, 신은정 로빈, 이진희 트와일라, 문성일 라우디. 승제이크, 트리조이, 진희트왈라, 핫라우디, 은정로빈. 


초연 때는 볼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재연이 길게 올라온다는 소식에 마음의 각오를 하고 관극을 갔다. 쉽지 않은 주제지만 적당한 재치와 유머로 초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나간다. 삶의 한 형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기에, 조이가 지닌 '장애' 는 차별이나 편견,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다름' 으로 인지하게 만든다. 움직임이 불편하여 다른 이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자라고 배우고 성장하며 고민하고 갈등하고 기뻐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인생' 인 건 여타의 삶들과 같다. 물론, 그 아픔의 깊이와 고통의 크기가 훨씬 깊고 거대하지만 말이다. 위기, 절정으로 치닫는 극 중후반부에서는 숨이 턱턱 막히는 답답함과 아득함으로 힘들었지만,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그 감정의 여파가 우울하고 무겁지만은 않았다. 소재가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극 초반의 이야기 전개에서 중심을 잘 잡아주기 때문에 절대 어렵다거나 불편하지 않다. 보고 나면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주변 또한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꽤 괜찮은 연극이다. 



※스포있음※


아쉬운 점이 없진 않았다. 일단 시놉시스만 읽었을 땐,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는" 아버지와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아들 사이의 갈등이 주된 내용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제이크에게 찾아온 "불행"이 지나치게 급작스럽다고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 상황에 처한 것처럼 몰입은 할 수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캐릭터의 과한 '헌신'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와 아내를 음주운전자가 낸 사고로 잃고, 10살이나 어린 동생을 돌보며, 장애를 가진 아들을 키우고 돌봐야 하는 힘겨운 삶에서, 이번에는 본인에게 가혹한 운명이 닥친다. 이 거듭되는 시련에 '왜 하필 나야?' 하는 의문이 들 법도 한데, 그 점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더라. 애초에 제 몸을 온전히 가눌 수 없는 조이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무려 17년이나 챙겨줘야 했던 삶이었다. 아버지이기에 견뎌낼 수 있던 매순간들이었겠지만, "나한텐 심각한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어. 나한테 나는 없어." 라고 자포자기를 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주체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자신에게 닥친 절망에 괴로워하고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고통이 있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자신을 찾아온 로빈에게 "죽고싶다"고 처음 고백하는 제이크의 대사가 아팠지만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게 된 조이가 제이크의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대화를 하자고 찾아온 장면에서는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게 아팠지만 말이다. 서로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고 의지하지만 각자의 힘듦으로 언성을 높이는 제이크와 트와일라의 귓가에 들리는 기계음.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하던 공기를 가르는 낭랑한 목소리. 안락사. 여기서 조이를 설득한답시고 당황감에 횡설수설하면서도 절실하게 말하는 트와일라의 대사들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캐나다 출신의 극작가가 쓴 이 극의 배경이 북미인 만큼, 그에 따른 장단점이 뚜렷했다. 종교를 운운하는 장면이 트와일라의 저 대사뿐이긴 했지만, 너무 설득력이 없어서 아쉬웠다. 또한 극 초반 라우디의 행동거지나 말투 등에서 불편함을 느꼈고, 조심스럽게 다루기는 했다지만 결국에는 '여자를 사는' 점도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그리고 번역투의 대사가 느껴지는 점도 약간의 거리감을 느껴지게 했다. 특히 티비 위주의 경력을 지닌 승준제이크나 은정로빈은, 문장이 자연스러웠다면 크게 드러나지 않았을 미세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몇몇 대사들은 듣는 순간 역으로 영어문장은 어땠을까 무심결에 생각했을 정도다.


트리조이는 정말 연기 잘 하시더라. 만약 조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졸업식날 풍경이 어땠을지 보여주는 장면에서 정장을 입고 똑바로 서있는 트리조이의 어깨가 확연히 비대칭이어서 놀랐다. 뒤틀린 근육을 표현하기 위해 두 시간 내내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미처 돌아오지 않는 것 같던데 배우가 얼마나 고생할지 확 와닿더라. 승준제이크는 최초발작 장면에서 좀 더 톤을 다듬어주면 좋을 것 같았고. 핫라우디도 연기 좋았다. 처음 만난 배우인데, 스트레스 받을 때 눈을 찡긋거리는 디테일이나 기복이 심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완급조절이 유려해서 마음에 들었다. 다른 작품에서 또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트와일라는 일부러 캐스팅을 이진희 배우로 맞춰 간 만큼 역시 좋았고. 17실비아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 덕에 초반 내내 진희트와일라에게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이번 시즌 내에는 재관람을 할 것 같진 않다. 힘들어... 하지만 기간이 긴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극을 보고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고 위로하고 또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어려운 소재를 잘 풀어내준 덕에 조금 더 성숙해진 기분까지 든다. 접이식 침대, 체크무늬였던 이불과 배우들의 상의, 출렁거리는 물소리, 계속 언급하던 '바닥의 바퀴자국'과 디테일한 묘사 덕에 생생하게 상상되던 절망의 냄새, 화분, 아이스크림, 책, 흩날리던 새하얀 종이조각들, 욕조, 그리고 노란 오리. "태어나는 모든 아이는 완벽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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