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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in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2017.04.23 2시 공연



배수빈 필립, 박성훈 올리버, 이진희 실비아, 이원 멀티. 배필립, 락올, 진희실비아. 배락진희 페어막.


아, 정말 좋은 공연이었다. 재연 자첫자막 관극에서는 재미있었지만 묘한 아쉬움이 남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삼연의 이 관극은, 정말이지 '완벽' 했다. 극이 바뀌어서 돌아왔다기 보다는, 극을 대하는 관객인 내 삶이 혹은 생각들이 변한 거겠지. 자첫 이후 때때로 떠올리던 프라이드의 대사들이 반가움과 애틋한 그리움의 감정을 솟아오르게 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고. 1막 1장부터 눈물이 주륵 흘러내리기 시작하리라고는 미처 각오하지 못해서 내심 놀랐고, 배우들의 몰입이 캐릭터들 그 자체여서 함께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 수 있었다. 락올은 배우 자첫이었는데 재연 때 만나본 꽃올과는 또다른 매력으로 통통 튀어서 사랑스러웠다. 배필립과 진희실비아는 일부러 맞춰 잡았는데, 역시나 훌륭한 선택이었다. 배필립 특유의 단단함, 그 속의 부드럽고 따뜻하며 순간순간 열정으로 일렁이는 사랑의 감정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 배우도 솜의 윱앨이랑 비슷한 맥락에서 다른 극의 다른 캐릭터로 만나기 꺼려진다. 그냥 완벽한 필립 그 자체라서. 진희실비아는, 58실비아의 대사들이 재연 때보다 잔잔하지만 훨씬 짙었다. 17실비아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고, 올리버의 대사처럼 그냥 '실비아여서' 고마웠다. 세상에 실비아 같은 사람이 조금만 더 많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일텐데. 


※대사 위주의 스포 있음※


1막 1장에서 눈물을 쏟게 한 건 역시 델포이의 신전 이야기였다. "지금의 잠 못 이루는 밤들도 다 가치가 있었다 깨닫게 될 거라고. 50년, 아니 500년 후에 이 시절을 사는 사람들은 그 시간들로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잠시 텀을 두며 객석을 바라보던 58올리버가 천천히 입을 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깊은 발성과 낮고 짙고 풍성한 톤의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전부 괜찮아지리라고. 그 위로. 과거 수많은 이들이 신으로부터 신탁을 받았던 그 아름다운 도시에서, 계시처럼 받은, 목소리. 이 대사는 2막 5장, 58실비아가 가방을 들고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이어진다.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그리고,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나지막하지만 따뜻하기 그지 없는 이 대사야말로, 연극 프라이드가 전하는 '프라이드'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대의 모든 고민이, 아픔이, 고통이, 슬픔이, 절망이, 다 의미 있는 거라고. 너를 너로서 존재하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괜찮아질 거라고. 그저 시간이 흐르듯 다 지나갈 것이라 자위하는 위로보다, 프라이드 식의 이 언어들이 너무나 고맙고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진짜 '위로' 가 무엇인지 이 극을 통해 느끼고 배웠다. 


또다른 위로. 2막 4장의 절망 후 2막 5장의 결말. 2막 3장 17올리버의 마지막 얼굴 표정과, 2막 4장 58필립이 단 한 장의 사진을 가슴에 품듯 끌어안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보여주는 표정이, 엇갈리듯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 변화를 믿냐는 17올리버의 질문. 엇갈리고 상처 입히고 상처 입고 또다시 상처 주기를 반복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시간과 기억과 인생이 엮일 수밖에 없는 인간과 인간이라는 관계. "우리에겐 역사가 있다는 거야," 라는 대사.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면서도 결국 올리버에게 돌아오는 필립. 무언가 결핍된 듯 중독처럼 헤프게 행동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인정하고 필립에게 매달리고 배신하는 관계를 이제 그만하겠다 선언하는 올리버. 다시 마주하는 두 사람. 그리고 순간 변하는 공기. 2017년에서 1958년으로 순식간에 시간을 뛰어넘긴 공간. "미안합니다." 올리버를 바라보는 배필립의 그 눈빛과 주변의 무겁고 밀집된 공기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고 묵직했다. 그 장면을 통한 위로. 상처 입었기에 남을 상처 주고 그럼으로 또다시 제가 더 큰 상처를 입었던 그 모든 존재들을 향한 사과. 그 마지막 장면의 위로가, 무척 강렬하고 고마웠다. 



런닝타임이 무려 3시간인, 긴 연극이어서 진입장벽은 높지만 너무나 좋은 극이다. 다른 페어로 또 보러가야지. 거의 쓸 만큼 조용하고 객석의 몰입도가 높은 극이고, 아트원 의자가 꽤나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재관을 할 수밖에 없다. 락올이 총알처럼 던진 키친타올에 순간 욱한 진희실비아와 제대로 빵 터진 객석의 웃음이 여즉 생생할 정도로, 흡입력이 높았던 공연이었다. 역시 합이 딱딱 맞는 페어의 페어막이란, 레전일 수밖에 없지ㅠㅠ 이 페어는 다음 사연 때 꼭 돌아오는 걸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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