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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in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2016.06.21 8시 공연
"회화는 사유야!!"
아주 오랜만의 연극. 깊게 생각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연극이라는 장르는, 무척 강렬하고 유의미하지만 그래서 짧은 시일 내에 여러 번 보기가 힘겹다. 자둘하면 더 많은 것이 들리고, 자셋을 하면 다른 것을 포착해내겠지만, 일단은 자첫의 날 것 그대로의 감상을 남겨보고자 한다.
마크 로스코 한명구, 켄 박정복. 명구로스코, 정복켄.
※스포있음※
100분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말로써 주고받는 팽팽한 분위기를 숨죽여 목격했다. 가장 먼저 강하게 치고들어온 씬은 2장 후반.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의 카라바조 <사울의 회심> 을 말하며 그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그분이 오셨...." 다는 말을 미처 끝내지 못한 로스코의 번뜩이는 안광. 그 찰나의 벼락 같은 영감의 순간. "레드요." 라는 켄의 사족에, 가까스로 보인 그 미세한 무언가를 붙들지 못한 로스코의 분노와 히스테리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레드' 의 이미지를 칼싸움 주고받듯 단어로 나열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 레드. 이어지는 3장에서 레드와 블랙,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을 말한다. 감성과 이성. 둘 사이의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꿈꾸지만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인간의 헛된 소망. 이어지는 바탕색 작업. 드넓고 새하얀 캔버스에 지독히 붉은 물감이 세찬 붓놀림으로 칠해진다. 화이트를 삼켜버린 레드. 그리고 블랙에게 삼켜질 것을 두려워하는 레드. 4장의 그 첨예한 갈등과 폭발. 트라우마. 한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는 강렬한 기억. "그것만 그렸어야지!!" 개인의 고통을 끄집어내 하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이유. "너는 처음으로 존재했다." 로스코의 말에 끓어오르는 무언가로 눈에 가득 맺힌 눈물. 그 표정. 새빨간 바탕 위 네모난 입구 혹은 입처럼 위압감을 뽐내는 새카만 네모. 그 그림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껴안는 켄의 뒷모습. 포스터의 그 로스코 자세. 마지막 5장. "세상으로 나가서 너의 의견을 말해라. 사람들이 너에게 집중하도록 해라." 클리셰. 진부하다기 보다는 깔끔하고 여운이 남는 결말. 2장,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 나 "한 가지 두려운 게 있다면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리는 거야" 라는 로스코의 대사를 들으며, 보다 강렬하게 신세대(블랙)이 구세대(레드)를 집어삼키는 결말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무난한 감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 다시는 만나지 않았을 테고, 뛰쳐나간 켄은 자신의 인생을, 남겨진 로스코는 결국 자살로 끝나는 마지막을 살아갔으리라는 짐작이 되어 아주 합당한 결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장소' 에 대한 로스코의 생각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그림들이 편안하게 안식할 수 있는, '예배당' 같은 곳" 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2년 뒤 그가 부르짖는다. "그림들이 유기적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종국에는 장소를 '뛰어 넘을' 거야!" 라고. 변화의 계기는 실제로 그 '장소' 를 마주하고 경험한 것. 그림은 장소에 "갇히게" 되리라는 판단. 도저히 자신의 그림에게는 못할 짓이라는 깨달음과 참담함.
"예술가는 비극적이어야만 하나요?"
"물론! 나만 빼고."
모든 예술이 "비극적" 이어야만 하고, "좋다는 것 빼고 전부 다!" 여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행복함, 기쁨, '좋음', 즐거움. 그 긍정적인 감정들 또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니. 하지만 적어도 묵직하고 끈덕지며 불퉁하지만 고집스러운 그런 가치가 존재해야 '예술' 이 '예술답게' 생존하고 숨쉴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그 '꼰대스러운' 말투와 단정적인 화법이 무척 피곤하고 답답하긴 했다. 단골 중국집이 없어졌지만 모퉁이의 중국집은 남아있다는 2장 초반 켄의 대사에, 로스코가 말한다. "좋은 것들은 사라지지. 모퉁이의 중국집은 남아있지만." 꽁꽁 싸매고,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시간을 들여 자신이 정한 방식대로 자신의 그림을 봐야 한다고 고집하는 예술가 로스코. "메네, 메네, 테켈, 우바르신. 왕을 저울에 달아봤더니 부족하더라." 끝없이 무언가를 저울에 달며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그의 인생이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이 간다.
4장에서 정복켄이 두 번 대사를 씹긴했지만, 정말 태연하게 넘어가서 신기했다. 얼마나 연습했으면 저렇게 입에 붙었을까, 싶더라. 그리고 대사 중 1막 켄에게 하는 로스코의 질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이라고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분명 "가수" 라고 들어서 '잭슨 폴락' 이라는 대답에 순간 물음표가 동동 띄워졌다. 그리고 마티스의 <레드 스튜디오> 에 대해 말할 때, "장식장 위의 그 yellow" 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켄이 "black" 을 말한 것도 잘 이해가 안 된다. 음. 잘못 들은 건가.
LP판으로 흘러나오는 클래식들이 장면장면을 더욱 생동감 있게 살려냈다. 붓칠 할 때나 영감이 왔을 때 음악과 딱 맞아떨어지는 그 희열감이란. 무대 가득한 캔버스와 물감, 양동이, 붓 그 모든 소품들 역시 극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냈다. 물감에 기름을 넣어서 팔팔 끓이는 거나, 가루 물감을 흩뿌리는 장면 또한 기억에 남는다. 공연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덕분에 극 시작 전 10여분 동안 무척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무대 곳곳을 구경했다. 3장이었나, 로스코의 대사에 '찰나의 예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절절이 묻어났는데 정확한 문장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 리뷰의 대사들 역시 정확하지 않은 게 많고. 대사집 갖고 싶다. 플북이라도 샀어야 하나....ㅠㅠ
벌써 4연이다. 최근 관대에서 출연배우 한 분의 발언으로 논란이 있었다.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고인 물' 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했고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무례했다. 특히 질문자가 n번을 관극한 다관람자였다는 점에서 말이다. 꾸준히 이 극을 관극하는 한 블로그의 글을 챙겨 읽는데, 이 사건과 관련해서 작성한 포스팅이 구구절절 공감갔다. 특히 "왜 제가 똑같은 관객이죠? 지난주의 공연을 본 저와 이번주에 공연을 본 제가 왜 같죠?" 라는 말이 정확하게 핵심을 찔렀다. '찰나의 예술' 인 공연은, 매순간 달라지기에 더욱 눈부시고 덧없고 동시에 더없이 소중하다. 무대 위의 배우든, 무대 아래의 관객이든, 단 한 번 뿐인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내고 공유한다. 늘 다르고 늘 가치있다. 그래서 중독된 것마냥 빠져들고 유혹당한다. 로스코처럼, 관객은 반드시 자신이 정해 놓은 잣대로만 작품을 관람하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면, 돈을 받는 상업예술을 하지 말아달라. 업계 관계자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돈을, 무엇보다 시간과 마음을 바친 관객은, 뚫린 입으로 극에 대해 '말할' 권리를 가진다. 서로를 존중하지 못한다면 이 아슬아슬한 관계는 무너진다. 그리고 지금, 한국 연뮤업계는 무척이나 위태롭다.
무척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극이다. 고민하도록 자극하고, 반성하도록 독려한다. 회화는 사유고, 인생은 예술이다. 예술이 있기에 인생은 풍부하고, 인생이 있기에 예술은 존재하고 나아간다. 치열하게, 아플 정도로 지독하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마주하고 창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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