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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in LG아트센터, 2016.08.19 8시
소설 페스트 원작에 20세기 문화대통령 서태지의 곡을 접목시켜 만든 창작뮤지컬, 페스트. 원작이야 읽어봤지만, 서태지 세대가 아니기도 하고 크게 찾아듣지도 않아서 그의 노래 중 아는 건 난 알아요나 교실이데아 정도였다. 서태지 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했음을 일단 짚고 넘어가려고 꺼낸 말이다. 나름 기대작이었던 이 작품의 뚜껑이 처음 열린 순간 터져나온 수많은 혹평들 중 '괴랄하다' 는 표현을 잊을 수가 없는데, 전위적인 완성품을 추구하였으나 명확한 세계관의 부재와 큰 매력이 없는 캐릭터들, 주제 전달을 위해 답습하는 클리셰들이 지루하고 당혹스러운 감상만 남겼다.
뚜렷한 주제를 기존에 없었던 '창작' 을 통해 보여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작품의 기반이 되는 세계관의 구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 각각의 개성이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이 존재해야 하고, 그 세계 속 그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마주하여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에 대한 고민은 부차적인 것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만화든, 극이든, 예술작품은 모두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이 맥락에서 페스트는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한참 뒤의 '미래'와 전혀 다른 도시 '오랑 시'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설명해야 했다. 짧은 시간 내에 상상한 전부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상상이 견고하고 선명하다면 약간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청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페스트가 창조해낸 세계가 탄탄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극 내내 무대 위의 세계와 괴리감을 느꼈다. 캐릭터 역시 독특한 매력이 넘처흐를 여지가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면적이거나 난잡했다. 코타르 정도가 인상적이었지만, 그건 배우의 캐릭터 해석 버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랑베르는 정말, 이도저도 아닌 캐릭터의 극치랄까.
주제를 마무리하는 방식 또한 지나치게 교훈적이고 나이브했다. 행복, 사랑, 희망. 좋은 단어들을 전부 다 붙들고 싶어하던 욕심이 극의 몰입을 방해하고 암전 때마다 한숨 짓게 만들었다. 메리골드의 꽃말,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을 언급하며 하는 타루의 대사 역시 크게 와닿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촌스럽지는 않지만 앉아있는 게 괴로울 정도로 지겨웠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오케와 2막에 있다던 랑베르의 솔로넘버 Zero 였다. 윤형렬 배우 노래 들으려는 목적이 컸기 때문에 인터 때 귀가할 수는 없었다.
오케 좋았다. 극 내내 거의 끊이지 않고 배경음으로 깔리는 반주가 뮤지컬을 보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했다. 넘버 자체의 편곡도 좋았는데, 오케가 풍성하고 잘 들리니까 상대적으로 배우가 그 위에 얹는 가사가 제대로 안들렸다. 넘버 가사를 절반은 제대로 못 알아 들었다. 엘지는 과학이라던데, 3층 음향은 예외였을까? 잔 대사할 때 마이크 지지직 잡음 있었고, 2막 넘버 중 하나에서 오케 하울링 너무 크게 잡힌 부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무리 엘아센이라도 음향이 완벽한 건 아닌듯 하다. 아무튼 서태지 음악을 알고 가야 가사를 정확하게 듣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버츄어 무척 좋았다. 오케 반주만 녹음해서 팔아주면 살 의향 있는데. 포우 때도 느꼈지만, 김성수 음감님이 편곡하실 때 넘버를 좀 길게 늘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보통 가요가 a-b(싸비)-a'-b(싸비)-c(클라이막스)-b'(마무리) 이런 느낌으로 구성된다면, 포우도 그렇고 페스트도 그렇고 넘버가 전반적으로 a-b-c(반주)-a-b'-a 약간 이런 식으로 반복적인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넘버 끝나나 싶으면 다시 2절이 시작되는 듯한 느낌이다. 저 알파벳은 완전 대충 적은 거라서 전혀 의미 없으니 흘려 읽어 주시길. 그래서 남녀 듀엣곡이 좀 지루하다. 배우들은 감정을 쌓아가며 폭발시킬 수 있지만, 그걸 바라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몰입이 살짝 떨어진달까. 물론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취향일 뿐이다. 이 점 이외에 김음감님 편곡은 완전 취저다. 극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편곡이 그나마 페스트라는 극의 정체성을 유지시켰다. 2막은 거진 김음감님 지휘를 구경했다.
손호영 리유, 윤형렬 랑베르, 오소연 타루, 조휘 코타르, 정민 그랑, 김은정 리샤르. 원캐 김주연 잔. 손리유, 곰베르, 오타루, 휘타르, 정민그랑, 은정리샤르.
배우들 이야기는 아주 간략하게. 매우 주관적이고 불호가 많다. 손리유는 대사 딕션을 명확하게 하려다보니 호흡 끊어서 강조하는 연기가 어색했다. 딱 책으로 배운 연기 느낌이랄까. 넘버 소화는 괜찮았는데 저음이 너무 울려서 가사가 정말 하나도 안들렸다. 곰베르는 많은 대사가 묘하게 버거워 보였고, 캐릭터 자체의 중구난방에 배우 본인이 같이 휘둘리는 느낌이었다. 솔로 넘버 좋았고, 2막 마지막 곡 떼창 부분에서 고음 확 올려서 하이노트 찍는데 짜릿했다. 오소연 배우는 처음 만났는데 사랑을 많이 받는 이유가 있더라. 연기도 능숙하고 능청스럽고, 노래도 좋은데 성량도 괜찮았다. 꽤 높은 고음이 살짝 불안하긴 했는데 떼창에서도 본인 목소리가 분명히 들릴 정도로 선명하고 깨끗한 목소리에 반했다. 휘타르가 최고였다. 연기도 그렇고 노래를 씹어서 극 안에 녹여내는 능력이 아주 베테랑이었다. 시대유감 듣고 처음으로 박수 쳤다. 시대유감-Live Wire 까지 이어지는 두 곡이 연출도 그렇고 가장 인상적이었다. 극 전체적으로 무대연출은 아주 유려했지만, 구조물 자체가 난해해서 매력이 반감됐다. 안무도 이 부분만 좀 볼만하고, 1막 초반 군무는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안 예쁜 비대칭이어서 거슬렸다. 정민그랑은 연기나 대사톤은 진짜 좋았는데, 넘버 소화가 매우 아쉬웠다. 너무 여리고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풋풋하긴 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은정리샤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취향이었지만, 딱 목소리 가기 직전의 상태라서 내내 불안했다. 아직 한 달도 넘게 남은 극을 위해 쾌차하셔야 할텐데. 노래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딕션도 매우 정확하고 연기도 좋았다. 잔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박물관에 놀러온 커플 중 여자 앙상블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연기 잘하더라. 커튼콜 때 개다리춤 추신 분이 마리 역 하신 앙상블인 것 같던데 몸연기 인상적이었다. 컷콜하니까 곰ㅋㅋㅋㅋ 쥠리유처럼 춤추려는 모션 취하다가 팔굽혀펴기로 급전환이라니ㅋㅋㅋㅋ 덕분에 커튼콜이 제일 재미있었다(....)
이렇게 혹평을 남기는 극이 지금까지 더러 있긴 했는데, 기대를 완전히 버렸음에도 그보다 더 실망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느껴서 기분이 묘하다. 좋았던 기억만 나열하는 글보다, 비판을 눌러담는 글이 훨씬 쓰기 어렵고 부담스러워서 이 포스팅 역시 오래도 걸렸다. 사실 말로 하면 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제된 글로 담아내기가 너무 어렵다. 세련되고 우아하게 짜증을 표현하고 싶은데 역시 잘 안되네. 그래도 간만에 창작에 대해 고민하고, 어디서든 입을 좀 털고 싶은 욕망을 갖게 만든 극이었다. 다시 관극할 일은 없을 듯. 재연이 올라올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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