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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한복판에서 신라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바라보던 남산. 신라인의 신앙이었던 경주 남산은, 그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저문 이후에도 굳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고. 역사의 목격자로서 천년이 넘는 시간을 담고 있는 이 산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했으니, 실천에 옮겨야겠지.
경주에서 묵었던 숙소는 프렌드게스트하우스였다. 샤워실이 공용이라는 점만 빼고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게하가 아니었나 싶다. 게하 이모님도 엄청 친절하셔서 이것저것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하셨다. 남산을 간다는 말에 동선도 구체적으로 일러 주시고, 얼음물을 꼭 챙기라며 패트병에 물을 담아 냉동실에 직접 넣어주시기까지 했다. 지도의 주황색 선을 따라 등산했는데, 걸음이 빠른 편이라 3시간이면 될 줄 알았는데 3시간반 정도 걸렸다.
일단 설명을 그렇게 들었음에도, 삼릉이 아니라 오릉에서 내린 나의 멍청함에 스스로 탄복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버스가 올 리 없고 택시도 다니지 않을 게 뻔해서, 그냥 걸었다............ㅋ 평지에 콘크리트 도보라서 힘이 들진 않았지만, 등산하기도 전에 과한 준비운동을 해야만 했다ㅠ
보물 63호,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웃음 짓는 얼굴 표정과 뺨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쳐나 더욱 가치를 지니며, 7세기 작품이라 추정된다고 한다. 중앙 본존불, 왼편은 관세음보살상, 오른쪽 연꽃 위는 대세지보살상이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 드디어 원래 스타트 지점인 삼릉에 도착했다. 세 명의 왕릉이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불린다.
해뜰 무렵 소나무숲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아침 햇빛이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이번에는 만나보질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그 아름다움에 반한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장소라는데, 나 역시 고요함이 떠도는 숲 속에서 가만히 커다란 렌즈를 들여다보는 사진사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표지판이 '신라'의 정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삼릉을 왼쪽에 끼고 슬슬 오르막 등산을 시작해보자. 금오봉까지 올라가는 이 길을 '삼릉계'라 부르는데, 11개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고 있는, 남산에서 가장 유적이 많은 곳이다.
처음 만나게 되는 불상은 머리가 없는 석조여래좌상이다. 옷의 주름과 매듭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덕분에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고.
마애관음보살입상이다. 돋을새김되어 있는 이 불상은, 입술에 아직도 붉은색이 남아있고 연꽃 위 대좌에 서있다. 관음보살인 이유는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각육존불이다.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에 새겨져있다. 오른쪽 암벽 위에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보물 666호, 석조여래좌상이다. 크기가 크지는 않은데,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 한참을 넋놓고 바라봤다. 석굴암 본존불상과 같은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8-9세기 즈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표지판이 있으면 무조건 옆길로 새서 불상을 다 만나봤는데, 갈수록 숨이 가빠져왔다. 아주 오랜만의 제대로 된 등산이라,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갈 듯한 기분을 맛봤다. 하지만 아픈 발은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마주한 탁 트인 전경. 경주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안개 때문에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과거와 많이 다르지 않을 것 같은 풍경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도 불상이 있는데, 지금은 복원공사 중이라 직접 가보진 못했다. 멀리서나마 합장 한 번 하고 지나갔다.
드디어 도착한 반환점, 금오봉. 비 오듯 쏟아진 땀 때문에, 여기서 찍은 인증샷 셀카에 담긴 내 모습은 영락없이 물에 흠뻑 젖은 생쥐꼴이다. 하필 초록색 티셔츠를 입어서 땀에 젖은 게 여실히 드러났다ㅋㅋ
재미있는 글이라 찍어봤다. 경주 시민이라면, 남산은 의식에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이 정말 자비없었다.......... 진짜 이게 길이라고?! 정말?!! 이라고 혼자 중얼대며 로프를 잡고 바위를 내려오면 그제야 표지판이 발견되곤 했다. 보통 등산할 때 오르는 시간의 절반만 들여 하산할 수 있는데, 남산은 오르는 시간 내려오는 시간이 거의 똑같이 걸렸다. 한 번은 확 미끄러지기도 했다ㅠㅠ 아무튼 사진 속의 불상은 약수곡 마애입불상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에 깜짝 놀랐는데, 높이 8.6m로 남산에서 가장 큰 불상이란다. 주름을 표현하는 기법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기법이다.
내가 감탄한 부분은 저 디테일한 손가락 끝 부분이었다. 생동감이 넘쳐 흐르는 듯하다.
내려오는 길은 카메라를 배낭에 집어 넣고 하산에 집중했다. 불상이 삼릉곡보다 적었던 이유도 있고. 반나절을 남산에 투자했는데, 이번 경주 여행을 통틀어 가장 만족스럽고 뿌듯한 일정이었다. 무지 힘들었지만, 다음 경주 여행에서도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게하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친절하게 샤워실 사용을 허락해주시고 자전거 대여도 안내해주신 이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b 자전거를 대여하고 국립박물관으로 직행했다. 가는 길에 황남빵을 사먹었다. 갓 나온 뜨끈한 빵을 낱개로 사서 한 입 베어먹었는데, 정말 극상의 맛을 체험할 수 있었다. 역시 배고파야 뭐든 최고로 맛있는 거야ㅠㅠㅠ 감탄을 거듭하며 슝슝 페달을 밟아 국립박물간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무료.
야외 잔디밭에 전시되어 있던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특이한 형태라 시선이 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에밀레종, 아니 성덕대왕신종. 이 거대한 종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상상하면서 한바퀴 빙 둘러보았다.
섬세한 무늬와 1천여자의 명문. 위용이 넘치는 우리의 문화재다.
국사책에서 봤던 거다!!! 동굴벽화의 동물들ㅎㅎ
전시해놓은 방법이 마음에 들어 시선을 잡아끌었다. 진짜 화살처럼 날아가는 듯하다!
3세기 중반 무렵, 낙동강 이동 지역 무덤들에서 발견된 새 모양의 토기. 등 쪽 구멍으로 액체(술)을 넣고 꼬리 쪽 구멍으로 따라내는 주자(注子)다. 죽어서 천상으로 날아가고픈 당대인들의 바람이 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녹슨 철모를 쓰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지나치게 서구적으로 생겼다.....ㅎ
어마어마한 양의 제기들. 이런 전시방식은 예전에 대영박물관 중국관에서 본 듯 한데....?!
금궅다리접시. 화려한 색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신라에 불교를 들여온 이차돈의 순교 장면.
신라의 미소.
그 유명한 화랑들의 임신서기석이다.
옛날에는 벼루가 이렇게 생겼구나........! 신기하다.
이게 신라촌락문서....!!! 대학 교양수업에서 아주 자세히 배웠던 내용이라 엄청 반가웠다. 책으로만 배운 것들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서 깊은 도시, 여기가 바로 경주구나!!! (물론 이건 원본이 아니지만)
택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까지. 경주국립박물관, 정말 놓칠 전시품이 없다! 완전 좋아.
상평통보도 보이고.
미륵삼존불의 모습이다. 가운데 본존불 옆의 두 불상은 일명 '아기 부처'라고 불린다.
까맣게 손때 묻은 발가락을 찍어봤다. (참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993)」유홍준, p.142~146)
감은사 사리갖춤.
턱을 괴고 있는 작은 불상들.
국보 275호, 말탄무사모양 뿔잔이다. 엑스선 촬영을 보면, 말의 몸 안쪽이 비어있고 뿔잔의 양쪽이 서로 이어진 내부구조가 확인된다. 삼국시대 무사와 말이 입었던 갑옷의 종류와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다.
황룡사의 복원예상도이다.
망새, 용마루 끝에 올리는 기와다. 황룡사 강당 터에서 발견된 조각을 복원한, 182cm의 거대한 크기다.
자세히 보면 사람 얼굴이 저렇게 나와 있어서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로뎅의 지옥의 문이 생각나는데, 이 얘기 제주 돌문화공원 포스팅에서도 말했었다. 이 망새는, 슬로베니아 류블라냐의 성 니콜라스 성당의 거대한 문에 새겨진 조각과 더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국립박물관의 특별전시관까지 다 둘러보고 나서 교촌마을 등을 관통하며 지나쳐 무열왕릉으로 향했다. 자전거를 끌고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거대한 트럭이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는 넓은 자동차도로 옆에서 페달을 밟아야만 하는 환경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다. 그래서 김유신장군묘는 아예 포기ㅠ.....
입장료는 1,000원. 태종무열왕릉비의 모습이다. 비의 몸돌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아있다. 국보 25호로,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어 동양권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진다고 한다.
무열왕릉. 사실 제대로 둘러보지는 못했다. 발이 너무 아파서 딱 죽을 것 같았다. 국립박물관을 전부 둘러볼 수 있었던 것도 반쯤은 오기였다....... 둔탱이 기질이 어디 가나요. 결국 다리를 다시 건너와서 바로 마트에 들어가 삼선슬리퍼를 하나 샀다. 여름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신발 양말 다 벗어던지고 맨발에 삼선을 신고 페달을 밟는 순간 느낀 그 시원함이란!!!
친구가 센스있게 보내준 기프티콘으로 시원한 커피를 찐하게 마시고 난 뒤에 향한 다음 행선지는 천마총이었다. 입장료는 동궁과 월지 입장료와 함께 계산해서 4,000원.
천마총 입구.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총'은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을 때 붙이는 이름이다. 표지판을 따라 산책하듯 걷다보면 출구가 짠 나온다. 길이 잘 조성되어 있더라.
그리고 분황사에 갔다. 입장료는 1,300원.
국보 30호, 분황사 모전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의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선덕여왕 시절의 석탑이다. 아마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상당히 특이한 형태와 색깔에 마음을 뺏겨 한참을 바라봤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이 있다. 안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고, 양 옆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인왕상이 불법을 지키고 있다.
분황사 석정. 외부는 8각이고 내부는 원형인 이유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의 진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절 내부에 있던 불상. 아무렇지 않게 오래된 불상이 놓여있다는 점이 새삼 천년고도의 역사를 증명하는 듯했다.
절 자체는 크지 않지만, 모전석탑의 역사적 가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꼭 한 번 가볼만한 곳이다.
그리고 저 자전거들을 따라 황룡사지로 향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드넓은 황야일 뿐이지만, 황룡사는 93년간 4대의 왕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다. 몽골침입으로 불타 사라졌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이런저런 설명보다는, 그냥 직접 가서 마주쳐보는 것이 더욱 확실한 만남일 것 같다. 여기서 보는 일몰이 그렇게 장관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전날 감은사처럼 낮은 구름이 잔뜩 하늘을 메우고 있어서 아쉬움을 감추며 돌아섰다.
반나절 동안 다리가 되어준 자전거.
배고파서 음식점을 찾다가 낙지라는 말에 혹해서 들어갔다. 완전 맛있게 영양보충을 하고 뿌듯한 배를 두들기며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
저녁 무렵이라 슬슬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역시 날아갈 듯한 지붕의 자태.
여섯시가 되어서야 슬슬 어두워지고, 또 한참이 지나서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반납해야 했기 때문에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며 쫓기는 기분을 느꼈다ㅠ
여기 야경은 워낙 유명해져서, 내 부족한 사진보다 훨씬 훌륭한 프로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쁘긴 했지만, 다음 경주여행에서는 동궁과 월지 말고 다른 곳 야경을 보러가고 싶다. 예뻐서 유명해졌겠지만, 유명해지면 본래의 매력이 점차 색을 잃는 것 같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와서 大자로 뻗고, 다음날 아침 일찍 신경주역으로 가서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아주 알차게 사흘을 꽉꽉 채운 여행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행복감에 뿌듯함을 오롯이 느꼈다. 자기만족을 목적으로 떠나서 스스로 아주 만족스럽게 다닌 시간이라서, 오히려 포스팅 자체는 썩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여행을 하면서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자아 안에 차곡차곡 보관하는 타입이라서, 그 기분을 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곤 한다. 아쉬워..... 이렇게 스스로 아주 만족한 여행은, 여행기를 써도 다시 읽어보지 않는 편이다.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튼, 생전 처음 '제대로' 마주하게 된 경주는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고 우아하고 유려하고 따뜻하고 눈부셨다. 머지 않은 미래에 또다시 방문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이만 포스팅을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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