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문득 여행을 가야겠단 생각을 했다. 몇 달 전부터 가고팠던 경주를 가기로 했다. 날짜를 정했다. 숙소를 알아보고 가봐야 할 곳들을 검색했다. 예약을 마쳤다. 짐을 꾸렸다. 이른 새벽 서울역에 가서 KTX에 몸을 실었다.
7월 한 달, 강좌 하나에 제대로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어쩐지 허한 기분을 내내 맛봤다. 온몸의 세포들이 강렬히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음을 깨달은 뒤에는, 일사천리였다. 국내여행이란 건, 그냥 옷가지 몇 개만 챙겨 바로 떠나면 되잖아요^^??ㅎ
일단 신경주역에서 내려, 경주역까지 버스를 탔다. 경주역 코인락커에 배낭을 보관하고, 버스로 불국사에 갔다. 버스정류장을 잘못 찾아서 헤맸는데, 경주역을 등지고 왼쪽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 직진하면 있는 버스정류장을 이용하면 된다. 모르겠으면 근처 주민들에게 묻는 게 직빵임.
입장료는 4,000원. 이른 아침이라 일요일임에도 아직까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왕문을 지나,
불국사의 꽃, 다보탑. 옆의 석가탑은 보수공사 중이라서 전부 해체되어 있었다ㅠ 경주는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 가족여행으로 가본 것이 전부였다. 수학여행으로도 안 가봄. 그래서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불국사의 모습에 상당히 신기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무지 덕에, 걸음걸음마다 경주를 새기며 여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캬. 진짜 날씨가 다 해먹은 경주 여행♡ 다보탑의 탑신이나 화려한 지붕이 계속해서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늘에 서서 한참을 세심하게 바라보다가, 슬슬 단체 학생여행객들이 모여드는 낌새라 자리를 옮겼다.
대웅전. 절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절에 가면 꼭 건물 한 바퀴를 돌아보며 지붕 아래를 찬찬히 둘러보는데, 특히나 지붕 끝 처마의 화려함에는 매번 감탄하게 된다. 한국 특유의 美를 뽐내는 아름다운 한옥의 자태.
특히 네 모서리 끝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갈듯 부드럽게 올라가 있는 것이 매력의 극치다. 저토록 아름답게 지붕 끝이 올라가 있는 건 일본에도 중국에도 없다.
"탑을 쌓는 공덕"에 나도 돌 하나 얹고 왔다. 벽 위 기왓장까지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소원 담긴 돌멩이들.
아, 경주스탬프투어를 불국사에서부터 시작했어야 하는데, 완전 까먹고 있었다ㅠ 근처 동리목월문학관에 가서 입장권을 살 때에야 생각이 나서 저 종이를 받았다. 불국사는 절 내부에 스탬프가 있어서 결국 못 찍었다는 슬픈 엔딩을 맺었다. 여기 말고도 망각으로 인해 못 찍은 스탬프가 꽤 많다. 멍청한 나......ㅠ
석굴암 가는 버스 시간이 30분 넘게 남았길래, 5분 거리의 동리목월문학관에 갔다. 입장료는 1,500원.
박목월 시인의 시집과 친필 편지. 이런저런 물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시를 낭송해주는 것도 있었다.
김동리 선생의 방을 재현한 모습. 벽에 걸려 있는 붓들이 인상적이다.
12번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면 석굴암에 도착할 수 있다. 입장료는 4,000원.
이 옆에서 입장권을 사고, 석굴암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한다.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공사 중인 석굴암의 본존불의 사진을 멀리서부터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급격하게 가팔라지는 계단을 헉헉대며 오르면, 유리창 저 너머의 본존불의 자태를 먼 거리에서나마 '구경'할 수 있다. 진짜 허무하더라..... 여러 강좌를 통해 무지한 정부가 석굴암에 시멘트질을 하며 이 역사적인 유물을 슬금슬금 훼손시켰다는 것을 배우고 복장이 터졌었는데. 이렇게 꽁꽁 숨겨두는 것이 과연 훼손된 본존불을 제대로 되살리려는 노력과 병행되고 있는 걸까.
국사책에서 많이 본 듯한 석굴암의 단면도.
일렬로 쭉 매달려있는 선명한 색의 등은, 어떻게 찍어도 잘 나온다. 폰으로도 잘 나온다b
내려가는 건 도보를 이용하기로 했다. 2.2km. 평소의 나라면 하산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을텐데, 새로 사 신은 나x키 트래킹화가 발을 아프게 하기 시작했다. 평발에다가 발등까지 건강하지 않아서 신발 살 때 늘 고심하는데, 앞으로는 나이키 절대 안살거야ㅠㅠ 흐어, 올해 여행들은 왜 죄다 발이 아픈거죠ㅠ
깊은 산 속이라 다람쥐랑 청설모를 자주 만났다. 불국사까지 다시 내려오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새벽 4시에 서울역에서 우동 한 그릇 먹고는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어서, 입구에서 산 옥수수를 먹어가며 배고픔을 달랬다.
다음 행선지로 엑스포공원에서 150번으로 갈아타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을 거친 후 주상절리로 갈 예정이었다. 근데 버스가 안 와......... 1시간을 버스정류장에 앉아 멍 때리고 있자니, 도저히 앞의 두 곳은 들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좌석버스에 안착한 뒤 주상절리로 직행했다. 150번 버스의 왼편으로는 저수지가 보인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어떻게 주상절리로 내려가야 하는지 몰라서, 같이 버스를 탄 모든 사람들이 각자 헤맸다..... 그냥 버스 내려서 길 건넌 뒤, 일반 가정집 입구 같은 길로 쭉 내려가면 된다. 여기 벽화 마을 역시 유명하다던데, 해도 뜨겁고 의욕이 안 생겨서 벽화를 봐도 그저 스치듯 지나쳤다.
경주의 주상절리는 '파도소리 길'이라는 예쁜 명칭을 가지고 있다. 산책로도 잘 꾸며져 있고, 탁 트인 바닷가를 마음껏 두 눈에 담을 수 있다.
흔들다리도 꽤 유명하고.
날씨 정말 좋았다. 7월 말의 한여름에, 반팔 반바지를 입고, 몸에 선크림을 바르는 걸 잊었다는 것이 함정이랄까. 여행 첫날부터 목덜미와 팔뚝, 허벅지가 빨갛게 익어서 내내 화끈거림에 고생했다ㅠ 포스팅 쓰다보니 곰탱이도 이런 곰탱이가 없네....ㅋㅋ 발 아프고 살 다 태우면서도, 꾸역꾸역 쉼없이 뚜벅이 여행을 강행하다니...!!
그렇지만 제주도를 다녀온지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경주의 주상절리를 보면서도 감탄이 나오진 않았다......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예쁜 바닷가를 산책한다고 생각하고 가야하는 곳이다. 사람도 많으니 감안해야 함!
날이 엄청 좋으니 구도만 잘 잡으면 좋은 사진이 나오는구나!! 풍경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버스 정류장 올라가서 그놈의 150번 버스를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다이제 몇 조각으로 허기를 달래며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셀카 찍어서 부모님께 보내드렸는데, 표정 완전 뚱하게 나옴ㅋㅋㅋㅋㅋㅋ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으니 저녁 만큼은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교촌마을에 있다는 맛집을 찾아 꾸역꾸역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왼쪽으로는 넓은 평지에 커다란 고분이 여러 개가 보였다.
우아한 곡선의 봉분이 태연하게 제 위치를 지키고 있다. 가만히 자리에 서서 사방을 쓱 둘러보면, 도시를 둘러싼 능선의 실루엣이 천년고도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드디어 목적지 도착!! 이틀 후에 또 들렸었는데, 역시 스탬프 찍는 걸 새카맣게 까먹었다ㅠ
홍보 아닙니다..........ㅋㅋ 교촌마을 입구 쪽에 있는 식당이다. 6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해물버섯전!!! 완전 맛있었다ㅠㅠb 배고픔도 한 이유를 담당했겠지만, 버섯이 잔뜩 들어간 부침개는 극상의 맛을 선사했다. 함께 마신 동동주도 입에 착 붙었고. 더 마시고 싶었지만, 여행 도중의 과음은 옳지 않으니 자제했다. 많은 양이었지만 저녁식사였기 때문에 천천히 접시를 싹 비우고 나왔다. 그래도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더라.
여기 '천년고도' 경주 아닌가요........ 촌스러.......... 유럽에서 수입한 관광용 마차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배가 부르니 마음의 여유가 생겨, 숙소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첨성대 야경을 보기로 했다. 넓은 잔디밭 공터에서 삼삼오오 모여 느긋하게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연을 날리고 있는 부자를 보며 옛 추억에 잠겨봤다.
원래 입장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없어졌더라. 평평한 평지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여있는 첨성대. 크기는 작지만, 잠시 바라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유려한 비율과 매끈한 곡선을 뽐낸다.
여름여행은, 나처럼 일찍 일어나고 일찍 들어가는 여행객들에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가 너무 늦게 떨어져ㅠ 일찌감치 벤치에 자리잡고 앉아 멍하니 주변을 구경하며 일몰을 기다렸다. 하루 종일 겪어야 했던 오랜 기다림의 시간들은, 짜증보다는 사색으로 침잠할 수 있는 평온함을 선사했다. 역시 나에게는, 내 마음대로 나 혼자서 하는 여행이 딱 맞는가 보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고요하고 평안했다.
점차 어두워지는 사위 속에서 하나씩 불이 켜지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몇 년 전 벨기에 브뤼셀에서 맞이한 스무살의 생일이 떠올랐다. 그랑플라스의 야경을 보기 위해 추위에 옷깃을 여며가며 한참 앉아있다가, 어느 순간 갑작스러울 정도로 어두워진 광장에서 하나씩 불빛이 피어오르는 그 찰나의 황홀함이란. 그것과 비슷한 감정을 경주의 첨성대 앞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그 때는 상상도 못했었지.
완전한 밤이 되면 더욱 아름다웠겠지만, 피곤해서 더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야경이 예쁘긴 했지만, 낮의 햇빛 아래에서 본연의 자태를 뽐내는 첨성대가 더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움을 내보인다는 생각도 있었고.
많아지는 사람들. 저마다 인증샷을 찍기 바빴다. 삼각대를 설치해놓고 본격적인 야경을 찍는 사진사들도 있었고. 다들 각자의 추억을 남기며 첨성대를 기억하겠지.. 경주역으로 돌아가 짐을 찾고, 역 근처의 게하에 체크인했다. 게스트하우스 이야기는 다다음 포스팅에서 언급하게 될 것 같다. 꽉 찬 경주의 첫날을 마치고, 잠에 똑 떨어졌다.
'여행기억 > Korea(20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월의 경주, 남산과 자전거 여행 (0) | 2014.11.18 |
---|---|
7월의 경주, 양동마을과 감은사지 (0) | 2014.11.17 |
5월의 포항 (0) | 2014.11.15 |
3월의 제주, 우도와 섭지코지 (0) | 2014.11.14 |
3월의 제주, 서귀포시 구경 (0) | 2014.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