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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니기에, 동생이 사들고 와서 본인 책장에 꽂고 나서야 비로소 손에 쥐게 된 책 두 권.
부부 소설가가 하나의 사랑을 서로 다른 시점으로 그려냈다는 독특함과, 오랜 약속이 연관된 러브스토리라는 점 정도만 알고 시작한 소설이었다. 도입부를 읽어낼 즈음의 탐탁치 않은 첫인상과는 다르게, 진한 여운을 남기며 책을 덮게 되었다. 지금 이 시점의, 현재의 나이기에 더 깊은 감정선을 흔든 것이 아닐까 싶다.
일단 여자의 시점인 Rosso 부터 읽었다. 표지가 주황색(......)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여성의 관점에 공감하기가 더 쉬우리라는 판단이었다.
초반에는 지루하게 흘러가는 일상적인 삶의 묘사에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후반부에서는 심리를 명징하게 추측할 수 있는 간결한 문장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품들 덕분에 휘리릭 읽어내릴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는, '에쿠니 가오리'가 자기 색깔이 뚜렷한 작가라는 점에 반론의 여지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인이 과거에 얽매여 있음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지하고 있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주변 이들에게 상처주고 걱정끼치며 자기합리화를 일삼는 아오이의 태도가 상당히 답답했다. 내내 변하지 않는 풍경화 같은 그 일상에 짓눌림을 느끼다가, 순간 마음을 동하게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잠 못드는 밤, 나는 사람을 그리워함과 애정을 혼동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매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Rosso, p.208)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고독이라는 엷은 막을 본인의 주위에 감싸 스스로를 보호하며 무기력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와닿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깨달음.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 인생이 있다." (Rosso, p.253)
저자의 후기에서도 이 맥락을 재차 확인받을 수 있다.
"인생이란, 그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성립하는 것이란 단순한 사실과, 마음이란, 늘 그 사람이 있고 싶어하는 장소에 있는 법이란 또 하나의 단순한 사실이 이 소설을 낳게 하였습니다." (Rosso, p.261)
내 인생은, 내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기차를 타고 스쳐지났던 밀라노 역의 모습이 새삼 기억을 관통한다. 유럽 특유의 잦은 흐리고 무거운 날씨와, 도시마다 묵중한 존재감을 담고 있던 우중충한 회색빛 건물들에 담뿍 묻어나던 시간의 냄새. 그리고 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하늘과 구름. 짙은 향수병에 걸린 사람마냥 한없이 그 하늘을 그리워하는 스스로를 문득 발견하곤 한다.
그 즉시 이어 읽은 Blu. 간결하고 직접적인 감정 묘사에 훨씬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쥰세이의 감성이 나와 맞는 부분이 많아서 더욱 공감하기 쉬웠다. 저 너머 과거 속의 아오이를 떠올리면서도 현재 눈앞의 메미는 그저 사랑스럽고 그저 위안이 된다는 이유로 곁에 두고 있는 그 이기적인 태도 역시 솔직히 드러냄으로써 보다 공감의 여지가 커지는 기분이었다. 다만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한 메미를 통해서 열정적이고 어렸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부분에서는 잔혹할 정도로 순수하기까지 한 자기애에 헛웃음이 지어졌다. 소설 전반에 걸쳐서 많은 남성들이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단순한 듯 하면서도 확고한 고집스런 특유의 성향이 명확히 드러났다.
작가 츠지 히토나리의 명료하고 단단한 문체는, 쥰세이가 택한 복원사라는 직업이 지닌 무게와 그 일을 하면서 가슴에 아로새긴 역사관을 드러낼 때마다 매력이 배가되었다.
"나는 화가가 살았던 먼 과거를 현대로 끌어와서, 다시 미래로 보내는 시간의 우체부인 셈이다." (Blu, p.22)
"만나 본 적도 없는 코사와 나 자신이 하나가 된다. 그가 보고, 느끼고, 흥분하고, 명상했던 그 시대의 숨결을 만난 것이었다. 나는 무당이 되었다." (Blu, p.187)
클래식과 꽃, 목욕, 앵티크 보석 등의 소품들을 통해 정체성을 보여주던 정적인 아오이의 삶보다는, 미술작품과 오래된 역사를 담고 가만히 정지해있는 피렌체의 거리, 그리고 하늘을 강조하던 동적이면서도 오래됨의 미덕을 풍기는 쥰세이의 인생이 더 가슴을 울렸다.
어떤 책을 먼저 읽어도 상관이 없다지만, 결말까지 고려했을 때 아무래도 Rosso 부터 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진부하다고 느낄, 지고지순한 인생 '유일'의 사랑을 다루는 소설이지만,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의 분위기와 어디에서도 이방인이라고 느끼며 겉도는 삶을 다루고 있기에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읽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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