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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Musical

파과 (2024.03.20 8시)

누비` 2024. 3. 24. 07:37

파과

in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2024.03.20 8시

 

 

구원영 조각, 김재욱 투우, 최재웅 류/강박사, 이재림 어린 조각, 김태한 해우, 이하 원캐.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를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에, 익숙한 배우들이 포스터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이 창작 초연극에 대한 기대가 꽤나 컸다. 근래 몹시 바빠진 현생에도 불구하고 잠시 짬을 내어 객석에 앉았건만,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작품성에 몹시 실망하고 말았다. 개막일부터 쏟아진 불호 후기에도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건만, 공연 시작 5분 만에 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지나 연출 특유의 과한 요소들이 곳곳에 묻어나는 건 둘째 치고, 원작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왜곡된 해석이 불편함을 넘어 불쾌했다.

 

'노년'의 '여성' '킬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화제를 일으켰던 원작의 정체성은, 이 극에 온전히 담기지 못했다. 회색으로 짙게 침잠했던 그의 삶이 사소하고도 특별한 계기를 통해 다시 색을 입기 시작하는 섬세한 변화를, 이 작품은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투우의 시선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투우의 시선으로 조각을 대상화한다. 조각 본인의 감각과 감정으로 피어오르지 않은 서사는 주변을 겉돌기만 한다. 투우를 통해 걸러지고 왜곡된 조각은 타인의 욕망으로 타자화 된다. 결말의 넘버 하나에 담긴 극의 주제는 허망하게 맴돌다 흩어질 뿐이다.

 

 

원작 <파과>의 외전 격인 <파쇄>에 담긴 조각의 과거사를 가져왔으면, 그 내용으로 조각이란 인물 자체를 설명했어야 한다. 단순히 류와 강박사를 1인 2역의 한 배우로 캐스팅하는데 그치다니. 강박사를 투과해 헤짚게 되는 류를 향한 복합적인 감정과 그에 따른 조각 본인의 내면 변화를 극 안에서 세밀하게 다루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넘버의 가사를 통해서만 이야기의 흐름과 인물의 변모를 드러내는, 이토록 안이한 연출이라니. 심지어 극장은 음향 안 좋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홍아센이면서 말이다!

 

액션씬은 배우들이 몸을 갈아 넣어서 인지 생각보다 볼만했다. 하지만 그놈의 슬로우모션! 각오를 하고 갔는데도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나 소설 원작인 창뮤요!!!' 티를 팍팍 내는 나레이션의 향연이라니. 이럴 거면 극화를 왜 했냐고요. 투우의 일그러진 욕정에 심장이 뛰기라도 하신 건가요. 1막 시작과 끝의 수미쌍관 장면만 봐도, 이 극은 투우가 주인공인 게 확실함. 웃음도 매력도 넘버도 투우에게 몰아넣은 느낌이라서 몹시 불쾌했다. 아니 그리고 연출가 전작에 나온 넘버는 왜 가져온 거야? 정잴 곡이라서 아깝기라도 했나??

 

 

와중에 구원영 배우는 닳고 닳은 조각의 지침과 일순 번뜩이는 삶의 생동감을 멋지게 드러내서 더 속상했다. 늙은 개 무용의 인형을 끌어안고 연기해야 하는 고충도 안타까웠고. 왼블통이라 조각의 얼굴 연기를 자주 볼 수 있어 좋았다.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자며 류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 어린 조각의 절규 장면에서,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표정이 특히 좋았다. 나도 모르게 같이 눈물 한 방울을 툭 떨굴 만큼.

 

어린 조각 역의 이재림 배우에게 무척 감탄하고 나왔다. 치기 있고 생명력 넘치던 청소년기를 어린 조각이 잘 보여줬기에, 퍼석하고 건조한 노년기의 조각이 더 부각됐다. 어리고 실력 좋은 여배들이 속속 데뷔하고 있어 참으로 든든하다. 매체 연기도 꽤 잘 어울릴 연기톤이던데, 다른 좋은 작품에서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태한배우야 뭐 믿고 보지만, 캐릭터가 워낙 별로라서. 앙상블 배우들을 고작 배경으로밖에 활용하지 않는 연출에 대한 분노가 다시 생생하게 떠오른다.

 

류 역할에 최재웅 배우가 캐스팅되었다는 공지를 보고 심장이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슈를 좋아하지만 단호히 웅을 택해 티켓팅을 했을 만큼 기대가 컸다. 하지만 배우님 캐해가 저랑 너무 다르세요.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웅류의 목소리에 귀도 마음도 지쳤다. 캐릭터 해석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알지만, 찰떡이라고 생각했던 배우가 전혀 다른 질감의 인물을 가져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류와 강박사 간의 차별점을 강하게 두기 위함일까 짐작이나 해본다.

 

 

마지막으로 이 극에서 가장 공을 들인 투우의 이재욱 배우.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워낙 인상 깊기도 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몹시 기대한 캐스팅이다. 그리고 역시 눈이 돌아버린 미친놈 역할은 완벽하게 소화했다. 낄낄대고 깐죽대고 비아냥대다가 삽시간에 냉랭하게 분위기를 바꿔내는 연기가 일품이다. 말 그대로 눈깔이 훼까닥 뒤집히는 그 표정이 어찌나 덕후의 마음을 정확히 저격하던지. 찰나의 맛깔나는 연기가 너무 맛있어서 심장이 뛰다가도, 극의 흐름과 과도한 넘버에 파스스 감정이 식었다. 차라리 연극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불호 가득한 후기는 오랜만인 듯하다. 이제 정말로 이지나 연출 작품을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볼 때만 해도 남아있던 일말의 호기심과 관심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공연이라는 장르가 주는 장점과 단점을 한꺼번에 마주한 관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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