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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안 그레이
in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2025.06.04 7시반

 

 
최재웅 헨리 워튼, 문유강 도리안 그레이, 김준영 배질 홀워드, 김태한 앨런 캠벨, 이영미 브랜든 부인, 해일리 시빌 베인, 이은정 샬롯 베인, 오윤서 어린 샬롯.
 
2016년 성아센 2층에서 자첫자막을 한 이래 주기적으로 그리워한 극. 갈망의 가장 큰 원동력은 때깔 좋은 뮤비의 음악과 정식 발매된 음원이었다. 오버츄어 끝 흘러나오는 익숙한 전주를 듣는 순간 차오르는 짜릿함, 전반적으로 낮아진 음정과 변주된 박자의 편곡에 치미는 아쉬움, 익숙한 음악과 가사가 휩쓰는 애틋함, 익숙하다 못해 귀에 절여진 목소리들을 향해 쏟아지고 마는 아쉬움이 당연할 수밖에. 듣고 있는가, 공연 제작사들이여. 공식 음원을 내면 더쿠들이 희망회로를 돌리며 알아서 기다린단 말이다!
 
9년 만의 재연 소식에 기뻤고, 공연장이 홍아센임에 슬펐으며, 첫공 후기들이 악몽 같아서 절망했다. 돌아오지 않는 극을 향한 하염없는 그리움은 찰나의 예술과 사랑에 빠져버린 자의 숙명임을 잘 알지만, 짜릿한 쾌락을 이미 맛봤기에 쉬이 벗어날 수가 없다. 영혼을 타락시키는 감각이 아니라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려나. 한창 덕질할 때는 그 목소리에 영혼까지 팔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사로잡히긴 했었지. 입덕 10주년 기념일에 무대가 아니라 투표 인증 사진 하나 받은 불쌍한 덕후의 쓸쓸함이 느껴지는가.
 

 
일단 배우들 얘기부터 간략하게 해 볼까. 초연 배질이었던 최재웅 배우는 무조건 맞춰야지. 진중하고 고지식하던 예술가 웅배질은 묵직하고 날카로운 철학자 웅헨리로 다시 태어났다. 솔직히 첫 넘버에서 영미브랜든의 도리안 찬양에 정신 차리라는 듯 그의 눈앞에서 손가락 스냅으로 딱딱 소리 내는 순간부터 광대가 치솟았음. 손가락을 뱅뱅 돌리기도 하고 지팡이로 브랜든 얼굴을 가리키며 휘휘 원을 그려 보이는 그 냉소가 참 좋았다. 그리고 이걸 2막 후반부에서 웅헨리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영미브랜든도 너무 좋았고. 제정신이 아닌 건 결국 네가 아니었냐는 그 조롱.
 
전반적으로 낮게 편곡된 넘버를 선명한 딕션으로 꽂아 넣는 웅헨리 목소리 덕분에, 그의 궤변을 한층 흥미진진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었다. 궤변을 비판하던 그가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아이러니가 9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재미를 선사한다. 유강도리안은 배우자첫이었는데 광기에 차올라 쏟아내는 문장들이 형형해서 좋았다. 준영배질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치일 뻔하다가 1막 솔로곡 '먼 훗날' 넘버에서 숨소리가 과해서 튕김. 근데 2막 '천사의 추락' 넘버는 또 엄청 좋아서 눈물 찔끔함. 다 지나가버린 찬란했던 여름날의 회한을 굉장히 잘 살리더라. 다작했던데 이제야 만나서 좀 아쉽다. 다른 작품 챙겨봐야지.
 

 

"이제 깨어나라 눈을 떠라
내 영혼이여
허상의 감각을 완성하라"

 
'Who is Dorian?' 넘버에서 바뀐 이 가사야말로 도리안 재연을 관통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초연에서는 "질투와 호기심 떨쳐내라" 였는데. 완벽한 감각을 추구하는 헨리와 그 허상을 좇는 도리안, 그 곁에서 함께 영혼이 썩어가는 배질까지. "허상의 감각을 완성하라"는 헨리의 오만한 제언은, 세 사람뿐만 아니라 시빌과 샬롯 자매, 옥스포드 멤버들까지 모두를 파멸로 인도한다. 백지와 다름없던 순수함을 쾌락으로 유혹해 완벽한 감각이라는 허상으로 밀어 넣는 실험을 하면서도, 평범하게 억압받아온 제 삶을 불쌍히 여기는 헨리의 위선이 가증스럽다. 선택을 종용하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떠넘기는 무책임한 지식인이다.
 

 
도리안 그레이 초연 후기 (2016.09.12)

자첫자막인데도 나름 길고 상세하게 주절거린 과거의 나에게 감사를 보낸다. 초연은 자첫자막을 하는 것이 아쉬웠는데, 재연은 자둘을 못하겠더라. 수많은 댕로극이 택하는 쉬운 길을 답습한 관계성 변경은 관객의 이해도와 함께 피로도를 높였다. 어긋난 과거를 보유한 배질과 헨리, 도리안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를 소중히 대하는 배질과 그런 그를 이용하는 도리안.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떠나자고 설득하고 곁에 있어주겠노라 약속하는 배질은, 도리안의 희망 그 자체다. 반면 초연 배질은 그렇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현재 남아있는 영상 박제에 근거하면, 초연 배질은 도리안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노라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건네줄 뿐이다. 제 영혼을 담아 완성했던 작품을 향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경의처럼.
 
주연 셋의 관계가 강해지며 샬롯의 역할이 도구화된 측면이 있다. 그의 번뇌와 혼란은 넘버 하나로 퉁쳐진다. 그뿐 아니라, 그의 죽음이 헨리가 도리안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드는 트리거로써 사용된다. 지금껏 도리안의 방탕함이 끌어낸 수많은 파괴와 죽음들은 대체 뭐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의 두 손으로 직접 행한 죽음만이 타락의 증거라는 거야? 대체 이 불합리한 논리는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초연 커튼콜 '레퀴엠' 넘버가 재연에서 없어졌는데, 찰나의 소풍을 운운하는 그 기만이 차라리 재연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초연의 초상화 영상은 김준수 도리안의 얼굴을 그려 넣은 그림이었는데, 재연은 형태가 명확하지 않은 실루엣 빛깔이더라. 시커멓게 썩어가는 얼굴 대신 푸른빛의 중간중간 피처럼 붉은 선들이 생겨나며 영혼의 추악한 타락을 은유했다. 대칭적인 기둥 여섯 개 위로 펼쳐지는 영상 연출이나 도리안의 수집욕을 설명해 주는 자막을 보고 있자니, 작아진 무대에서 최선을 다했다 싶었음. 불호가 없지 않으나 워낙 기대가 없었기에 전반적으로 잘 봤달까. 원작처럼 초상화를 찢는 대신 제 목을 긋는 결말은 초연이나 재연이나 별로고. 그림 안으로 사라져 버린 도리안이라니, 너무 미화 아닌가.
 

초연 오슷 소유자입니다 :)

 
막공주에 커튼콜데이 주는 건 정말 별로야. 기립도 없고 죽음처럼 내려앉은 고요한 적막 속 셔터 소리만 가득하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박수도 적고 환호도 눈치 보이고. 흑흑. 노래도 불러주지 않는 건조한 컷콜보다는 공식의 박제를 달라. 뮤비와 오슷을 내놓아라. 시즌이 끝나도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그리워할 수 있도록. 다음 시즌도 만날 수 있으려나, 도리안 그레이.

도리안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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