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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in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2관, 2024.11.29 8시



이형훈 노든, 이정화 펭귄, 박근식 앙가부/웜보, 이규학 치쿠.

관극을 안 하다 버릇하니 예매창을 뺀질나게 들락날락거리는데도 실결까지 도달하지가 않더라. 마지막 티켓팅까지 망하고 나서야 경각심을 가지고 결제를 질렀고,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오랜만의 댕로 방문에 익숙한 카페를 택해 여행기를 쓰는데 더 익숙한 얼굴이 찾아왔다. 덕분에 반가운 얼굴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객석에 앉을 수 있었다. 지금 내 곁의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생생한 사례가 된 이 만남으로 인해 극이 더 풍성하게 다가왔다.

"혼자가 된다는 건 죽음보다 무서운 거야"

"나한테는 노든이 나의 가장 반짝이는 것이에요"


아기 펭귄을 키운 코뿔소. 동물들이 주인공인 원작의 동화를 무대 위에 어떻게 구현해 낼지 궁금했는데, 의상과 소품들 그리고 배우들의 몸짓과 연기톤으로 각기 다르게 표현하더라. 코끼리의 긴 코, 코뿔소의 짧고 하얀 뿔은 소품으로, 펭귄의 목둘레에는 노란 손수건을 코뿔소의 손목에는 얼룩무늬 토시를 둘러서. 객석의 어린 친구들에게도 이러한 구분이 잘 느껴졌으리라 생각한다. 어린 웃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나까지 즐거워지더라. 어린이뮤 보러 가보고 싶네.


끝이 보이지 않는 긴긴밤의 뒤에는 또다시 새로운 날이 찾아온다는 것이 지긋지긋하던, 죽는 것보다 어려운 살아남기를 꾸역꾸역 이어가던, 끊임없는 악몽에 시달리며 죽음보다 두려운 고독에 휩싸이던 한 영혼. 복수를 곱씹으면서도 약속한 눈앞의 의무를 성심껏 행하는 낡고 지친 노든의 다정함이 애틋하고 눈부시다. 만남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이별이 매번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바라지 않은 잔혹함으로 반복되는 건 대부분의 인생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순리이기에, 노든의 절망과 고독이 더욱 아프게 공감된다.

"날 둘러싼 단단한 긴 코들
바람보다 더 빠르게 함께 달린 기억
길고 길었던 밤이 있었지
어떻게 그 밤 다 견딘 걸까
악몽을 깨워준 어설픈 위로
사막 한가운데 함께 그린 바다"


누군가에 곁을 내어줌으로써 기뻤고 즐거웠으며 또 행복했지만, 내어준 곁이 비어버림으로 인해 슬프고 아프며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만난 누군가로 인해 다시 생을 이어갈 이유를 찾는 것이 바로 생명이리라. 상실은 기억을 남기고, 그 기억이 너와 나를 지켜준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뜬눈으로 지새우던 긴긴밤들을 지나왔음에도 결국 다시 긴긴밤으로 들어서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사랑의 형태가 아닌가.

"네가 있어줬기에 완벽한 밤
너의 모든 밤도 그럴 거야"

초록으로 일렁이는 코뿔소의 바다에서 나의 삶을 살아갈 터이니, 펭귄인 너는 파랑 지평선을 지닌 너의 바다를 찾아가라는 따뜻한 응원. 기억은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고, 종과 성별, 출신과 나이가 다르더라도 영혼을 공유하며 서로를 구원한다. 살다 보면 때로는 함께이고 때로는 혼자인 긴긴밤이 이어지리라. 하지만 서로가 있었기에,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바다에 늘 함께이기에 언제나 완벽한 긴긴밤이리라.

운좋게 컷콜 촬영 가능 회차였음


뮤지컬 긴긴밤의 클라이막스인 넘버 긴긴밤을 풀어주실 제작사를 구합니다. 펭귄의 날개 너머 나에게까지 크고 아름다운 위로를 건네던 노든의 말을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어. 다름은 존재 간의 교류에 어떠한 장벽도 세울 수 없다. 사막에서 바다를 꿈꾸며 코뿔소를 아버지처럼 따르던 펭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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