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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장편의 만화책을 독파했다. 총 43권으로 완결난 이 책 <꼭두각시 서커스>는 인터넷 이곳저곳에 추천사가 가득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흘에 걸쳐 다 읽어 내렸는데 스토리라인이 엄청 탄탄하더라.
초반 그림체는 러프하고 굵은선이 많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갈수록 안정을 찾아간 면도 있고 나도 익숙해져서 괜찮았다. 스토리는 정말 생소한 전개 방식이었다. 분명히 주인공인 것 같은데 죽었다고 하고 한참을 안나오길래 뭐지 내 감이 떨어졌나- 싶었는데 역시나 다시 등장해서 열심히 활약을 보여주질 않나, 엥? 이십몇권 밖에 안됐는데 왜 최종전 같지? 뭐야 이거? 싶었는데 최종보스가 최종보스가 아니었다고 하질 않나, 떡밥이 아닌 척 하면서 수많은 떡밥을 던져놓고 깔끔하게 싹 다 회수하질 않나, 무엇보다 반전에 반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들어 있어 끝까지 흥미로웠다. 40권까지는 정말 결론이 해피일지 새드일지 짐작하기 어려웠는데 42권 즈음 되니 대충 결말이 보였다. 궁금하시다면 끝까지 정독해보시기를.
이야기 전개를 조금쯤은 말할 수밖에 없을 캐릭터에 대해서도 언급해보고 싶다. 중요한 스포일은 생략하고 말하자면 처음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결국 주인공인데, 사이가 마사루라는 소년은 초반에는 찌질찌질의 극치를 달리다가 결심을 굳히고 진지해야 할 때는 온 몸을 내던져 포스를 뿜어 내는 남자로 변한다. 시로가네(라고 불리고 실은 엘레오놀)는 등장할 때부터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결국 모든 이야기의 핵심인 여자이고 가토 나루미는 앞의 두 사람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남자다.
『꼭두각시 서커스 28권』 中
이 녀석이 마사루. 눈이 살아있는 녀석. 웃을 수 없는 '인형'과 싸우는 '인간(병기)'의 이야기이기에 사람에 관한 명대사가 참 많이 나온다. 그 중 대부분이 이 녀석의 입에서 터져나온다. 꼬맹이지만 여러 사람의 기억을 지닌 채 조숙한 소년이 되어 버린 마사루는 진심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애착한다.
『꼭두각시 서커스 34권』 中
웃음을 연구한다는 진지한 아저씨 '인형'과 싸우면서 마사루가 하는 대사. 유한한 인간의 삶을 긍정하면서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짧은 삶이 아름다우며, 그 유한함으로 인해 서로 협력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 서로를 아끼고 역사를 중시하며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킨다. 내가 소년만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에는 이러한 가치관이 소년만화에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이 있다.
『꼭두각시 서커스 36권』 中
오글거리긴 하지만 '소년'만화라는 장르가 따로 있는 이유를 돌직구로 날린 대사가 아닐까. 아, 참고로 '청년'이라는 단어에 여자와 남자가 모두 포함되듯, '소년'이라는 단어에 남성인 소년과 여성인 소녀가 모두 포함된다고 여기고 '소년만화'라는 단어에 태클을 걸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결국 '소년만화'의 주인공은 거의 대부분이 남성인 '소년'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성장해가는 성장만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언제나 어른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이라는 대사가 적격인 것 같다.
마사루 얘기만 잔뜩 써놨지만 내 최애캐는 기이ㅠㅠㅠㅠㅠ 엉엉엉 기이 짱 좋아ㅠㅠㅠㅠ 처음 등장했을 때는 느끼해!! 를 외쳤지만, 갈수록 개그도 많이 치더니 결국 과거 이야기 나올 때 격침... 23권부터 27권까지 진행되는, 인형들의 시작을 알리는 바이 형제의 과거가 아니라 조연인줄 알았던 한 캐릭터를 둘러싼 과거이야기는 내 기준에서 이 만화의 하이라이트였다.... 현재의 갈등보다 그 갈등의 시발점이 된 과거 이야기가 얼마나 탄탄하고 얼마나 공감이 가느냐에 따라 결국 모든 스토리가 제 가치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꼭두각시 서커스-통칭 꼭서-는 이 점을 충분히 만족시키고도 남았다.
『꼭두각시 서커스 24권』 中 기이♡
덧붙여 이 만화가 정말 좋았던 것은 선한 역과 악역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는 거. 물론 최종보스가 계시고 마구잡이로 학살을 하는 인형도 있고 변절한 인간도 있고 아무튼 여러 군상들이 있지만, 그 캐릭터마다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과거가 있어서 결국 거의 대부분의 캐릭터에게 애정을 조금씩이나마 나눠줄 수밖에 없었다. 각 캐릭터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마음과 행동을 불쌍하게(긍휼히 여긴다-는 표현이 만화책에 등장했었다) 여기게 만드는 작가 후지카 카즈히로 씨의 능력이 돋보였다.
물론 지적하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니다ㅋ 작가가 분명히 교회(혹은 성당)을 다니거나 혹은 그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아님 말고~ 라고 하기에는 천당과 지옥을 돌려 말하고, 죽은 사람들이 위(천당) 혹은 아래(지옥)로 함께 가는 모습을 슬쩍 보여주고, 끝부분에 가서 교회의 목사를 등장시켜 나레이션을 하게 하고, 기도하는 장면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아, 그리고 '피에타'와 똑같은 포즈도 나온다. 첨부하고 싶지만 스포일이 될테니 생략하겠다ㅠ 물론 종교적인 내용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고 그저 작가의 가치관이 이렇구나~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일 뿐이었다. 그래서 사실 지적이라기 보다는 짐작에 가깝고,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광대와 서커스를 주제로 하는 만화에 종교적인 밑바탕이 깔려 있는게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말이다.
그리고 뭔 놈의 여자들이 죄다 마사루랑 가토한테 다 반하는 거냐며...... 아니 뭐 구해준 사람에게 반한다는 뻔한 공식은 알겠는데 이건 너무한 듯ㅋㅋ 작가가 꼭서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남성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매력적이고 멋지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나는 기이가 좋다ㅠㅠㅋㅋ 좋은점을 굳이 나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음!
꼭두각시, 인형이라는 클리셰한 소재를 가지고 이 정도로 멋진 스토리를 만들어 낸 작가에게 우선 찬사를 보내고 싶다.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또 눈물도 몇 번 흘렸다. 모든 캐릭터에 사랑을 쏟아붓는 마음이 좋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하고 탄탄한 이야기를 만들어 줘서 감사했다. 만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꼭서를 지금까지 읽지 않은 내 자신을 조금 구박해야 할 것 같지만, 완결난 명작을 읽는 건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기에 지금가지 안 읽은 걸 칭찬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악역의 궁극적인 소망인 인류멸망을 다루고 있음에도 적절한 개그가 섞여 머리가 아프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날 잡고 만화책 읽고 싶을 때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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