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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존중/Other

이력서 (오은)

누비` 2013. 12. 11. 13:00


이력서

- 오은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경향신문 온라인 칼럼에서 읽고 모니터를 부여 잡으며 이건 내 이야기야ㅠㅠㅠ를 외쳤다. 지금은 자소서 쓰는 것따위 때려치고 기말고사 준비를 하고 있지만, 올해 10월 한 달은 이력서와 자소서 서류를 가지고 내내 씨름했다. 비극적이게도 좋은 결과는 그닥 많이 얻지 못했고. 원래 글이라는 게 몇 주만 지나도 금세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 지는 것이라고 해도, 자소서는 여타의 글과는 전혀 달랐다. 쓸 때도 부끄럽고 민망한데다가 과연 이런 허무맹랑한 소설을 믿는 걸까, 대체 뭘 읽겠다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제출하고 나서도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하면서 몇 번 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날리기도 했다ㅠ 이건 대체 글의 어떤 장르라고 봐야 하는지. 



자소서를 잘 쓰려면, 아니 기업의 입맛에 맞게 쓰려면, 일단 강의를 들어야 한다. 돈 주고. 이번에 도전한 생애 첫 취준에서 나는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류 탈이 그렇게 많은가보다....ㅠ 핑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있겠지만, 이 험난한 취업시장에 조금이라도 발을 들여놓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절절한 외침이 흠잡을데 없는 진실임을 알 것이다. 평범하게 살던 대학생이 대체 뭘 알아서 기업이 원하는 말투의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인턴을 뽑는 서류에서 인턴 경험을 쓰라고 하는 기괴한 "인적자원시장"에서는,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내 경험을 이야기해보자면, 밤새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새하얀 모니터 창을 바라봤다.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지나치게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과거의 자신을 책망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정말 많이 행복했는데... 왜 내가 원해서 했던 일들에 대해 자책하고, 즐거웠던 시간 속 기억들에 대해 회의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2013.12.06 은주의 방 18화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579414&no=18&weekday=sat




개성이 있는 한 명의 인간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치여 색깔도 없이 묻히고 싶지 않다. 미약하더라도 뚜렷한 빛을 스스로 발하며 살고 싶은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의문이 잔뜩 쌓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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