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Ryu Jung Han

지킬앤하이드 (2022.01.15 7시)

누비` 2022. 1. 16. 17:34

지킬앤하이드

in 샤롯데씨어터, 2022.01.15 7시

 

 

 

 

류정한 지킬/하이드, 아이비 루시, 최수진 엠마. 류지킬/류하이드 자열여섯. 류과숮 페어 자셋자막. 류지킬 270번째 공연. 2022년 첫 관극!

 

 

2016년 레베카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생일날 류배우님 공연이 있었다! 덕분에 올해의 첫 관극이자 자체 생일 선물은 이 공연으로 낙찰되었다. 무려 20일 만에 만난 류배우님은 여전히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특히 정성껏 부르는 사골이 눈부셔서 자꾸 눈물이 났다. 익숙한 디테일에 더해진 새로운 디테일과 노선이 신선하고 충격적이어서 2막 직전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티켓 값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컨프롱에서도 처음 보는 디테일을 마주하고 짜릿한 카타르시스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13일 새벽에 깜짝 선물처럼 출연해주신 나이트라인 초대석 인터뷰에서 "공연이란 게 참 희한한 게, 그 빈틈이 계속 보여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완성하는 단계라고 생각하구요." 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 지점이 류배우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유라서 무척 고맙고 벅찼다.

 

 

 

 

기본적인 디테일은 이전과 유사하게 정석적이었으나, 노선은 지킬과 하이드 모두 이전보다 한층 극단적이었다. 이사회에서 스트라이더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사과하겠습니다" 라며 오만하게 비꼬는 건 익숙했지만, 이어 펼치는 주장과 설득이 어찌나 고압적이고 단언적인지 내가 이사회였어도 이날의 류지킬에게는 절대 불가 절대 불허 네이를 외칠 수밖에 없겠더라. 댄버스 경과 대립하는 약혼식에서도 "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라고 11월 초 즈음부터 바꿔 말하던 대사를, 이날은 원래대로 "신념을 밝히기 위해선" 이라고 말했다. 선과 악을 분리해 통제할 수 있다는 제 생각은 지켜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모두에게 밝히고 동의를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라는 류지킬의 확고함이 한층 명확하게 담겼다.

 

 

"참아온 나날 힘겹던 날

다 사라져 간다 연기처럼 멀리"

 

 

그래서 사골 도입부마저도 깨달음의 기쁨보다는 단호한 신념이 더 강하게 일렁였다. 힘겹게 참아왔던 모든 날들을 허공에 흩날려 보내듯 부드럽게 손짓하면서 부르는 이 소절의 음성까지 완벽했다. 연기처럼 피어올라 공기와 뒤섞이며 흐릿하게 희미해지는 목소리가 청각으로 들리는데 시각으로 보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날 찢어 죽여" 하면서 공간과 공기를 음성으로 찢어내던 짹의 다니엘처럼, 이날 류사골의 "연기처럼 멀리" 부분은 음성으로 흐릿해지는 연기를 그려냈다. 표현력이 부족하여 류배우님의 목소리가 선사하는 이 공감각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풀어낼 수 없음이 통탄스럽다.

 

 

확고부동한 신념을 지닌 류지킬의 또 다른 내면이 극단적인 형질의 하이드로 탄생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트랜스폼 마지막 "존재는?" 하며 객석을 향해 얼굴을 치켜들지 않는 건 처음 봤는데, 제 존재에 대한 의문보다는 확신이 강한 하이드라는 인상이 들었다. 거울을 보며 낮게 웃은 뒤 등을 확 펴며 걸음을 뗀 류하이드가 왼쪽 철제 선반을 만지고선 이내 천천히 실험대를 관찰한다. 주사기를 집어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선 내던지듯 내려놓고, 탄성 같은 낮은 숨소리를 간헐적으로 토해내며 늘어선 시험관들의 주둥이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쓸어낸다. 맨 오른쪽의 붉은 시약이 담긴 시험관을 집어 든 류하이드의 냉랭한 눈빛이, "아름답구나" 하며 바라보던 류지킬의 반짝이는 눈빛과 대비되어 오싹함을 더한다. 이내 류하이드는 낮고 섬뜩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미친놈"

 

 

1/5 마티네에서 처음 추가됐다는 이 디테일을 상상만 해봤는데, 생각보다 더 나지막하고 건조한 음성에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찟했다. 시험관 액체를 개수대에 버리는 디테일이 딱 저 날만 있었다고 해서 너무 아쉽다. 시험관 얌전히 다시 꽂아두는 건 이 하이드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제발 디테일 돌려주세요. 이어지는 얼랍1도 이전과 사뭇 달랐다. 펜을 내던지고 왼손에 이어 오른손의 지배력까지 확인하며 양팔을 벌린 류하이드가 "기대 이상의 발전!" 을 외치고선 "자유" 하며 부르짖는데, 그 익숙한 얼굴이 너무 생경해서 경악스러웠다. 너무나 인간의 형상이기에 오히려 인간이 아닌 인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얼랍1에도 기괴함과 섬뜩함이 더해졌다. 똑같은 극에서 이토록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표현할 수 있다니. 류하이드의 270번째 무대라고 해도, 아무리 빈틈이 많은 극이라고 해도, 배우님의 무한한 변주와 노력이 그저 감탄스럽기만 하다.

 

 

 

 

다른 디테일은 유사했으니 다 뛰어넘고 컨프롱. "개소리마라" 하며 양손을 들어올리는 등 류하이드는 포악함과 잔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내내 강력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특히 류지킬이 "난 너를 죽이고!" 라고 말하는 도중에 류하이드의 왼손이 튀어나와 오른쪽 손목을 턱 붙드는 순간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웃음질테다" 끝부분은 류하이드의 음성이 뒤섞일 때가 많았는데, 이날은 류지킬의 목소리가 류하이드에게 거의 완전히 잠식됐다. 넘버 하나에 지킬과 하이드의 표정과 목소리가 휙휙 바뀌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데 이렇게 계속 디테일을 바꿔주시면 관객은 그저 전율에 사로잡혀 압도당할 수밖에요. 이 대체불가한 짜릿함을 류배우님의 컨프롱 이외에 대체 어디서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하필 지금 하필 이 때

어쩌라고 이 무슨 행팬가"

 

 

컨프롱에서 앞섬을 풀어헤치며 온몸을 내던져 하이드를 밀어냈던 류지킬은 하필 지금 다시 돌아온 하이드를 느끼며 절망하고 절규한다. 트랜스폼 때처럼 왼손이 얼굴을 향해 정확히 달려드는 디테일이 이 장면에서도 추가되어 한층 절박하고 처절했다. 엠마의 품에 안긴 채 이젠 편히 쉬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환하게 웃는 류지킬의 맑은 얼굴이 너무나 평안해 보여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일생 동안 제 신념을 위해 투쟁해온 지킬이 마지막 순간에서야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그 찰나가 어찌나 고요하던지.

 

 

류배우님 막공이 확정되어 벌써 아쉽지만, 300회를 채우기 위해 지방 공연에 참여하실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 있어서 묘하게 섭섭하지는 않다. 이번 여름은 류랑을 하며 행복한 추억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며, 다음 관극 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