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2020.05.29 8시)
드라큘라
in 샤롯데씨어터, 2020.05.29 8시
류정한 드라큘라, 조정은 미나, 강태을 반헬싱, 이예은 루시, 진태화 조나단, 조성린 렌필드. 류큘 자열아홉. 류선녀 페어세미막. 류선녀 자여섯이자 자막.
확실히 이 극은 미나에게 많이 좌우된다. 구멍이 많고 설정이 부족한 이 고정된 서사 안에서, 드라큘라는 개연성을 탄탄하게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 미나는 그 서사를 매력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미나의 노선에 따라 이야기의 질감이 달라진다. 류배우님을 좋아해서 드큘 위주로 관극을 하고 있긴 하지만, 초반에 관극할 때는 미나와 루시의 욕망과 선택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는 했다. 기존의 규범 속에 머물렀을 때 얻을 수 있는 "완벽한 인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머리가 가슴을 이기지 못해" 감정과 욕망을 선택하고 마는 미나의 피날레가 달라진다. 원작에서 파생된 수많은 작품들 속 반헬싱이라는 존재를 무척 사랑하는 편인데, 이 극에서만큼은 크게 매력이 없다는 것도 이야기의 주체가 미나임을 실감케 한다. 드라큘라가 인간을 유혹하여 그 영혼을 탐한다며 배척하고 저주하고 악마화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들 개개인이 지닌 욕망의 표출을 교묘하게 억압하려 드는 건 바로 인간 남성들이다. 보호라는 미명 하에 지배하는 반헬싱과 그 무리들이 같잖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스포있음※
이번 시즌 총 12번의 류선녀 중 6번을 관극했는데, 자첫인 0329와 자막인 이날 0529 공연이 각기 다른 의미로 가장 재미있었다. 두 회차 모두 선녀미나가 평소에 자주 택하는 노선이 아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색감 강한 미나를 선보였다. 주로 택하는 노선은 드큘에게 구원을 내리고 용서하는 인상이 강했다면, 0329는 맹렬하게 스스로를 내던졌고 0529는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고 번뇌하며 두려워했다. 강렬하여 짜릿했던 0329와 사뭇 다른, 담백하지만 짙은 여운을 남기는 이날 공연으로 페어자막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평소보다 더 냉랭하고 건조하지만 미나 앞에서만큼은 세상 절절해지는 류큘과 유난히도 많이 흔들리고 휘둘리며 두려워하는 선녀미나가 비로소 온전히 맞닿은 순간, 예정된 비극으로 치닫는다. 오랜만에 눈물을 흘릴 만큼 처절한 러빙유가 담백하고 정석적인 피날레로 이어지며 곱씹을수록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왜 이렇게 모든 게 서툰지 모르겠어요"
이날 류큘의 노선은 기차역에서의 이 대사다. 여자를 웃게 만드는 데 좀 서툰 것 같다는 임미나의 디테일에서 착안한 이 애드립은, 평생 모든 것에 서툴렀노라는 류큘의 고해가 되어 서사를 완성시킨다. 서툴기에 사랑을 눈앞에서 잃었고, 서툴기에 섣부르게 신을 저주했으며, 서툴기에 열정에 휩싸일 때 통제를 잘 못하고, 서툴기에 인간의 기준에선 끔찍한 일들을 죄책감 없이 자행한다. 서툴기에 미나가 원한 건 영원한 삶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서툴기에 미나의 고통을 온전히 공유하게 된 뒤에야 회의한다. 많은 날들을 지낸 삶이니 "세상 모든 걸 알 줄 알았"지만, 영혼을 내던지는 미나를 마주하고 비로소 잘못을 깨닫는다. 서툴렀기에 제 손으로 비극을 시작했던 류큘은, 서툴렀지만 온 마음을 다했던 제 삶의 구원을 선택한다.
렌필드 때문에 난처했다면 대신 사과하겠다는 조나단의 말에 "전혀 전혀 전혀" 하며 강하게 부인한다. 새 삶 새 땅을 향한 의지를 내뿜던 Solitary Man 넘버를, 이날은 마치 이야기를 시작하는 서술자처럼 불렀다. 그래서 유지되고 있는 Fresh Blood 의 속삭이는 디테일이 한층 냉랭하고 단호했다. 고고하고 오만한 백작의 태도는 루시를 향한 우아하지만 고압적인 인사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받아낸 부케로 정확하게 루시를 가리키며 눈빛을 형형하게 이글거린다. 연신 감사를 읊조리며 달려드는 렌필드에게서 팔을 확 빼버린 류큘은 왼손으로 그의 뺨을 만지며 혀를 차고는 "멍청한 놈" 하며 그대로 밀어버린다. 잇츠오버에서 다시 등장한 뒤 오로지 반헬싱만을 응시하다가 잿더미로 흩어지라는 말에 세상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크게 입을 벌리며 비웃는다. 더롱거에서 코트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계단을 오른 뒤 오른쪽 경사면으로 올라갈 때 평소에는 휘청이며 정육면체의 모서리를 짚었지만 이날은 반듯하게 걸으며 잠시 손을 잡았다 뗐다. 반헬싱과 대화하는 피날레의 대사톤도 달랐다. 여전히 냉랭하고 건조하며 고압적인 류큘의 목소리에서 "네가 날 쫓았어. 멈출 줄도 모르고." 라는 비난이 뚝뚝 묻어났다.
하지만 미나 앞에서만큼은 여리고 서툰 영혼일 뿐이다. She 에서 평소보다 약간 길게 비명을 질러낸 류큘은 "오 신이여 제발 제발 그녀를 살려주세요" 라고 흐느낀다. 5/26에만 있었던 바닥을 탁탁 치는 류막심 디테일은 없어졌다. 구원은 없었냐는 미나의 물음에 5/26 공연보다 선명한 목소리로 "그 누가 알까요" 라며 울음을 섞어낸다. 러빙유에서 미나의 노래를 들으며 제 양손을 내려다보다가 그가 등을 돌리자 황급히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난다. 끝내 자신을 버리고 지금의 삶을 선택한 미나를 보며 무너지듯 무릎 꿇은 류큘은 양손을 가슴에 모으며 포갠다. 관 안에서 안식을 취할 때와 같은 동작으로. 하지만 그것만으로 가슴을 찢어내는 아픔이 사라질리 없다. 흐느끼며 그대로 손가락 끝부터 손바닥을 마주하며, 류큘은 기도한다. 선녀미나가 피날레에서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모아내던 그 손모양으로.
잇츠오버가 끝나고 "미나!" 하고 외친 류큘은 상처 받은 목소리와 눈빛으로 "미나.." 하고 울먹이고 나가버린다. 트시 도입에서 미나와 정신교감을 시작하듯 꿈을 꾸는 사람처럼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디테일은 이날 처음 봤다. "영원한 삶!!" 하고 쩌렁쩌렁하게 목소리를 긁어낸 뒤 반헬싱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왼손으로 관을 턱 잡아서 세게 흔들렸다. 피날레. 끝내 자신을 끌어안는 미나의 온기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괴로워하지만, "날 구원해줄 사람은" 하며 미나의 앞에서 미소를 걸어낸다. "피와 고통의" 하며 칼을 쥔 제 손을 내려다본 류큘은 왼블 쪽으로 나와 "차가운 암흑 속에" 하며 눈을 질끈 감는다. "남의 피를 탐하던 그늘 속의 영혼" 하며 미나를 향해 돌아서는 옆모습이 단정하고 맑다. 아프지만 끝까지 미소를 걸어낸 류큘이기에, 홀로 남겨진 미나의 절망이 더욱 깊고 애달프다.
이날 가죽바지가 아닌 스키니한 검은 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핏이 너무 예뻐서 만족스러웠다. 물론 레자를 사랑하니 수선 중이라고 믿겠습니다. 왼블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앉았는데, 등을 돌리자마자 류큘이 시야 가득 들어오는 미나의 관점에서 기차역 장면을 시작할 수 있어 신선했다. 시덕션 첫 키스에서 선녀미나가 류큘 자켓을 훅 내릴 때, 뜨겁게 붙어있던 입이 떨어지며 아랫입술이 살짝 늘어나는 그 섹슈얼한 텐션이 너무 좋았다. 류선녀 이제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죠ㅜㅜ 4년전 그때처럼 몬테인가요.. 페어막이 마티네라서 페어세미막으로 자막해야한다는 게 원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