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2017.09.12 8시)
시라노
in 엘지아트센터, 2017.09.12 8시 공연
류정한 시라노, 최현주 록산, 임병근 크리스티앙, 주종혁 드기슈, 김대종 르브레. 류라노, 블리록산, 빙티앙, 주기슈, 대종르브레. 류블리빙. 류라노 6차, 시라노 8차 관극. 류라노 노선이 너무너무 좋아서 오늘 남기지 않으면 절대 안될 것 같아 쓰는 류라노 위주 후기.
※스포주의※
'비겁함'을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곧고 패기 넘치며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이날의 류라노는, 평소보다 어렸다. 초반에는 오페라 같은 발성으로 풍성한 저음과 우아한 목소리로 공간을 꽉꽉 메웠는데, 나의 코에서는 유쾌하지만 강렬하게, 터치는 여유롭고 가볍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리고 컴플렉스인 코를 운운하며 시무룩해있자 "자네 코가 어때서!" 하고 버럭하는 르브레의 말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록산 초반은 마치 절친한 친구에게 칭얼대듯 비밀을 공유하듯 반짝거리며 노래하는 류라노. 하수쪽 구조물 올라가서 노래하는 장면에서 뒤쪽 조명 계속 모였다가 퍼졌다가 하며 형태 제대로 못잡아서 좀 산만했다. 아무튼 거인을 데려와는 늘 좋았는데, 특히 중후반부에서 마치 공간을 장악하며 소리가 천장으로 솟았다가 그대로 내려꽂히는 듯한 목소리로 패기와 자신감, 신념과 의지를 선명하게 내보였다.
자신을 향해 웃어보이는 록산의 얼굴에 떨려오는 감정을 채 감추지 못하고 입을 귀에 걸고 있다. 벨쥐락의 여름 넘버 시작할 때 충만한 행복으로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과거를 떠올리는 듯한 반짝이는 눈빛이었고, 중반 쯤 록산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이런저런 기억을 끌어내고 그 공유에 기뻐하고 감격해하는 눈길으로 내내 록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 이 장면부터 류라노의 노선이 정확하게 진행됐다. 만족스럽지 않은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삶의 마지막까지 '희망'을 붙들고 있는 시라노였다. 록산이 말하는, "자꾸 떠오르는" 누군가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어쩜 그리 잘생겼는지" 하는 부분에서 꽃받침 하고 있다가, 잘생긴 건 아닌데? 하는 식의 입모양으로 중얼거리며 표정을 굳히던 예전 공연들과는 다르게, 이날은 그럼에도 마지막 부분에서 얼굴에 미소를 활짝 지으며 응, 나지? 그래서 나? 이런 느낌으로 록산을 바라봤다ㅠㅠ 그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것이 아닌 이름에 마치 어린아이처럼 무너지는 표정. 크리스티앙을 챙겨주겠다는 대답을 듣고 고맙다며 자신을 꽉 끌어안는 록산의 포옹에 놀라 양팔을 든 채 경직된 동작과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류라노. 마치 레이디와의 플라토닉한 사랑만을 추구하던 기사처럼, 포옹하고 손을 잡아주는 록산의 행동 하나하나에 깜짝 놀라는 시라노의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발코니씬. 크리스티앙 '성대모사'를 제대로 한 건 처음이었다. 빙티앙처럼 목소리를 내다가 그렇게 매정한 말을 떨어뜨린다면, "죽어버리고 말거예요" 이 부분부터인가 스며들듯 류라노 본인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숨기 위해 뒤집어쓴 하얀 천을, 너무 선명하기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버릴 수밖에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뒤돈채 달빛 아래 어둠에 숨은 시라노. 눈물 가득한 눈과 울먹거림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된 자신의 고백에, 마침내 사랑이 넘버로 화답하는 록산의 말들. 자신의 마음이 인정받았다는 듯, 그 결실을 쥐어보려 행복한 얼굴로 오른팔을 허공으로 뻗는다. 하지만 "왜 몰랐던 걸까," 하는 록산의 말에 현실로 돌아오며 행복감으로 차오른 눈물이 아픔으로 변질되며 공기가 가라앉는다. 크리스티앙을 달 아래 밝은 빛으로 내보낸 뒤 발코니 아래 기대 선 류라노가, 마치 엄마를 잃어 버린 아이 같았다. 오롯이 홀로 버려진 듯한. 크리스티앙을 부탁한다는 록산의 넘버에서, 마지막 "편지를 쓰게 해줘요 / 날 위해" 하는 말에 시라노는 록산의 손을 꽉 맞잡으며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런 그의 손등에 키스를 해주는 록산. 조금 놀란 눈빛, 애틋하지만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사랑임을 알기에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표정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는 시라노. 저미는 듯한 슬픔을 끌어올려 부르는 얼론 초반. 그 감정을 꾹꾹 눌러담으며 나아가리라 다짐하는 얼론 중후반. 마지막 포즈를 취할 때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힘있게 동작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2막. 편지를 보내고 돌아온 류라노가 1막보다 진중해졌길래 전쟁으로 인해 철이 들은 건가 싶었는데, 슬쩍 도발하자마자 금세 넘어오는 드기슈의 대꾸에 눈빛부터 장난스러움이 차오르며 온 표정 가득 장난기가 넘실거리더라. 바로 옆에서 걱정하고 근심하는 르브레의 현실주의자적 면모와 완전히 대조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답게 위트를 섞어 그저 원하는 대로 즐겁게 살아가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다 전투를 목전에 두고 마지막 편지를 크리스티앙에게 건네며 록산을 보지 못하는 건 견딜 수 없다는 마음을 내비칠 때의 먹먹함이 짙었다. 전쟁터로 찾아온 록산이 자신을 끌어안자, 또 움찔하며 몸둘 바를 모르는 어린애 느낌이 여전히 있었다. 아무리 못생겼더라도 그를 사랑한다는 록산의 말에, 류라노는 또 희망을 품는다. 사위의 소란스러움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얼굴의 시라노는, 그래 록산이라면 정말 나를, 이런 나라도 사랑한다고 해줄지도 몰라, 하는 섬광 같은 희망으로 눈빛이 변한다. 그러나 르브레가 전하는 비보. 뭐? 하고 물은 뒤 그의 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며 믿지 못하겠다는 제스쳐를 보인다. 지난 번에는 크리스티앙의 부상 자체에 더 방점이 있었다면, 이날은 이 타이밍에? 하는 부인의 의미가 더 많이 담겼다. 물론 크리스티앙을 진심으로 아꼈기에, 시라노는 죽어가는 그를 보자마자 록산의 눈치를 보며 달려가 거짓이지만 그가 가장 듣고 싶어했을 이야기를 속삭이듯 전달한다. 아득하고 망연한 표정으로 서있는 시라노의 귀에 록산의 절규가 쏟아지자 순간 찾아오는 깨달음. 이제 다시는, 이 마음을 전달할 수 없겠구나. 그 운명을 인지하는 류라노의 미세한 표정이 저리도록 아팠다. 절대 / 절대. 짓씹듯 뱉어내는 단어로 고이고이 접은 감정을 마지막으로 두 눈 가득 담아내며 오열하는 록산을 바라보는 시라노. 그리고 크리스티앙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아듀!" 는 강하게, "록산," 은 흐느낌이 섞인 울먹임으로. 여기서 아듀는, 오롯이 간직해온 자신의 사랑에게 전하는 시라노의 마지막 인사였다. 순앤가스콘 시작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떨리는 모습이었는데, 마치 한기가 어린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고 왼손으로 오른팔을 쓸어내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길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 자신만만함이 아니라 두려움에 휨싸인 듯 칼을 뽑는 동작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러나 "친구들이여," 하고 외치며 마음을 다잡고, 목숨을 포함한 모든걸 내던지는 마음으로 "나 시라노의 죽음을!!" 하고 부르짖는다. 후반주의 "가스콘-" 을 마치 절규처럼 쏟아내며 끝내는 가스콘맆.
류라노 엔딩씬에서 이렇게까지 오열한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전쟁터에서 록산을 떠나보내며 "아듀!" 를 외쳤던 류라노는, 15년 동안 완전히 제 감정을 죽였다. 그 긴 세월 내내 아빠 같은, 오빠 같은 마음으로 록산의 곁에 머무른 류라노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 없었다.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오늘 보고 싶다는 말에 록산은 편지를 꺼낸다. 다정한 눈빛으로 편지를 받아든 류라노는 조심스럽지만 조급해보이는 손길로 펴고서는, 하아, 하는 작은 탄식을 뱉으며 손가락으로 편지 속 글자들을 하나씩 쓰다듬었다. 바로 그 순간, 15년 동안 완전히 묻어둔 록산에 대한 시라노의 사랑이, 되살아났다.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박제처럼 보존되어 있던 감정이 류라노의 손 끝에서부터 시작되어 공간 속으로 피어올라 생명력을 얻는, 그 떨리는 애틋함 마저도 생생하게 넘실거리는 찰나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노선 해석 때문에, 안녕 내 사랑 넘버도 전혀 다른 맥락으로 다가왔다. 도입에 나오는 "안녕 그대 눈부신 내 사랑" 은, 15년 전 작별했던 록산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록산에 대한 재회의 인사였다. 15년 전 아듀, 라고 인사하며 떠나보낸 사랑을, 안녕, 하며 다시 마주하는 감정 흐름이 편지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엔딩 장면의 개연성이 한층 부각됐다. 그 다음 "안녕 그대 영원한 내 사랑" 은 15년 전 전쟁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당신을 만나겠다는 의지가 현실이 된 중의적인 인사였다. "이렇게 마주쳐버린 운명" 을 씁쓸해하면서 결국 전할 수밖에 없는 세 번째 "안녕". 그리고 마지막, 속삭이는 듯한 "아주 / 잠시 / 안녕" 은 필연적인 작별을 내포한 인사였다. 입술도 아닌, 뺨 근처에 맞대오는 록산의 입술에 류라노는 일순간 숨이 멎은 듯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1막에서 록산이 그의 편지를 끌어안으며 "너무 아름다워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라며 기뻐했던 것처럼. 자신의 상처를 붙들고 오열하는 록산에게 설핏 행복이 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며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네요," 라고 하는 류라노. "날 위해 울지 말"라는 목소리도 어찌나 따뜻하고 다정하던지. 록산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던 류라노는, 이제야 제가 먼저 손을 뻗어 록산의 얼굴에 살풋 손가락을 대고는 눈물을 닦아준다.
이날 류라노는 "이렇게 비겁하게 숨어 있을 순 없지!" 라며 당당하게 두려움을 마주했고, "희망이 있을 때만 싸우는 게 아니다 이 멍청아!" 라고 말하지만 평생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았다. 오롯이 제 힘으로 거둬낸 결실을, 희망을 놓지 않았기에 얻어낸 결과물을, 류라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손에 쥔다. 그 순간 끄으윽,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신음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린다. 그런 시라노를, 이제는 자신이 보호자라는 듯 울음을 삼키고 눈물 젖은 얼굴에 미소를 띄워내며 그를 따뜻하게 보듬고 껴안아주는 블리록산. 그의 품 안에서 엉엉 울다가 부르는 마지막 넘버. 심장을 짓이기는 세찬 감정이 넘쳐흐르며 엉망으로 노래 속에 섞여드는, 날 것 그대로의 울음 같은 얼론맆. 자그맣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손과 편지를 꼭 붙든 채 숨을 거둔 시라노 앞에서, 그제야 피를 토하듯 절규에 가까운 오열소리를 토해내는 블리록산. "죽음조차도 엉망진창"이라 자조하던 시라노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지켜준 블리록산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원작의 시라노도 얼핏얼핏 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의 여지를 주신 이날의 류라노 노선에 찬사를 보낸다. 개취이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관극 중 취향에 가장 부합하는 시라노를 만나고 와서 무척 짜릿하고 행복하다. 노래 완벽하고, 목소리 우아하고, 잘생기고, 틈틈이 귀엽기까지 하신데 그 와중에 연기까지 이렇게 훌륭하시면 저는 어떡하나요ㅠㅠ 표를 4장 정도 들고 있는데 마티네를 제외하더라도 일단 갈 수 있는 회차는 더 잡아야겠다. 류라노라는 캐릭터 자체에 이렇게 치일 줄은 몰랐는데ㅜㅜ 막공이 한 달도 안 남았고 막공 티켓팅도 제대로 망했다는 거 실화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