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2020.06.11 8시)
리지
in 드림아트센터 1관, 2020.06.11 8시
유리아 리지 보든, 홍서영 엠마 보든, 최수진 앨리스 러셀, 이영미 브리짓 설리번.
캐슷 공개 당시부터 이 극은 무조건 취향이리라 직감했건만, 류큘에 영혼을 판데다가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중소극장을 지양하게 됐다. 이대로 초연 못사로 남을 수는 없어서 결국 꾸역꾸역 일정을 맞추고 전날까지 산책을 한 끝에 막공 전주에야 가까스로 자첫자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울었다. 이 멋진 극을 이렇게 보내야 하다니! 이 짜릿한 커튼콜을 이렇게 함성 하나 없이 즐겨야하다니! 떼창에 헤드뱅잉 하면서 미친 듯이 뛰어놀아야 마땅할 커튼콜에서 애써 입술을 깨물며 함성을 삼켜내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쇼노트가 양심이 있으면 올해는 리지 내년은 헤드윅, 이렇게 매년 번갈아가며 이 멋진 락뮤들을 계속 올려야 함! 권리 아니고 의무임ㅇㅇ
영미브리짓은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첫 소절 부르자마자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우아하고 매혹적인 고급스런 저음과 명징하고 날카롭게 적재적소를 찔러내는 고음이 유려한 물결처럼 공간을 휘감았다. 존재감만으로 보든가를 꽉 채워내고, 나레이터이자 극중 인물로써 의미심장하게 노래하고 말하는 여백과 목소리는 오싹오싹 전율이 일 정도로 짜릿했다. 이렇게까지 치일 줄 몰랐는데! 율리지는 역시 최고였다. 소심하고 여린 아이에서 순간순간 내비치는 기묘한 광기가 마침내 터져나오는 그 짜릿한 쾌감이 엄청난 대리만족을 선사했다. 어쩜 그렇게 카랑카랑한 고음을 흠 하나 없이 완벽하게 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홍엠마와 수진앨리스도 냉랭하면서도 뜨겁고 수줍으면서도 자극적인 매력을 양껏 뽐냈다. 더블캐스트 못 만난 게 너무너무 속상하다.
미해결된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이 극의 전개는 음산한 미스테리보다는, 미친 더위 속 끈적하고 음습한 광기가 일순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카타르시스를 앞세웠다. 스릴러라는 장르도 여러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전자가 <레베카>라면 후자가 <리지>다. 이 극은 락을 채택함으로써 끈덕진 분노와 맹렬한 저주를 한층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야기의 소품이자 음악의 확성기로써 활용한 스탠드마이크, 몽환적이되 강렬한 색감의 조명과 영상, 2층 무대의 구성과 여러 개의 입출구로 다양하게 만든 동선, 과일을 사용한 시청각의 자극까지, 연출 제반이 극을 한층 쫄깃하고 매력적으로 만들어냈다.
단 하나의 불호는 의상. 정정한다. 극불호다. 꽤 많은 작품을 만나왔지만 이토록 화가 치미는 의상은 처음이다. 앨리슨과 리지의 농염하고 매혹적인 장면이, 두 사람의 의상 때문에 완전히 빛을 잃었다. 손가락 끝까지 유혹적인 두 사람을 보면서도 마음이 하나도 동하지 못한 건 오직 의상연출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와 목적이 있더라도 극의 몰입 자체를 방해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그건 실패한 연출이라 믿는다. 답답한 보든가와 꽉 막힌 시대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2막과의 극적 대비를 주기 위함임은 알겠으나, 1막 의상만 이야기에 녹아들질 않고 둥둥 떠다녔다. 애초에 그 의상이 시대 고증이 된 건지도 의문이고. 관객이 연출의 의도를 이해하려 노력하게 만들지 말고 극의 구성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
"보든가의 모든 문은 꽉 잠겨 있어"
꽉 잠긴 문이 왈카닥 열린 순간, 꼭꼭 숨기고 감추고 외면해온 모든 진실들이 와르르 쏟아져 더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인내를 포기하고 욕망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부르짖는 모든 여성들의 인생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극. 성별과 무관하게 각자의 생각과 꿈을 펼쳐낼 수 있는 작품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많아지길 빈다. 여성만 나오는 극이 흥행할 수 있냐는 지긋지긋하고 편파적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은 이제 그만하도록 하자. 커튼콜에 함께 뛰어놀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그 일상에 리지가 함께하기를, 기다리고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