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Musical

엘리자벳 (2019.02.09 7시)

누비` 2019. 2. 10. 03:44

엘리자벳

in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2019.02.09 7시





신영숙 엘리자벳, 정택운 죽음, 강홍석 루케니, 민영기 요제프, 이태원 소피, 최우혁 루돌프, 이시목 어린 루돌프. 신엘리 막공.



원하는 캐스팅 조합이 거의 없었고, 있어도 평일 마티네여서 도저히 시간을 못 내다가 결국 서울 막공에서야 가까스로 신엘리를 만나고 왔다. 당연히 잘하리라는 믿음과 신뢰를 훨씬 뛰어넘는 완벽한 모습에 관극 내내 감탄과 전율을 만끽했다. 여주 원탑극의 주인공으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인물의 일생을 보여준 신엘리의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 사랑스럽고 귀엽던 소녀가 시간이 지나고 해가 거듭되며 점차 변해가는 모습이 너무나 설득력 있어서, 엘리자벳이라는 인물에 깊게 공감하고 몰입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난 나의 것' 이라는 넘버가 있는데 여러분들의 삶의 주인공도 여러분이라는 신엘리의 막공 무대인사가, 극을 통해 전달해준 주제 그 자체였다. 신엘리를 만날 수 있어 몹시 영광이고 행복했다.





※스포주의



천진한 표정과 맑은 눈빛과 비브라토를 완전히 지워낸 청량한 목소리가 어린 씨씨의 사랑스러움을 온전히 표현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랄한 걸음걸이로 돌아다니는 모습과 주변의 모든 것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디테일도 좋았다. 결혼식 장면에서도 격식에 맞춘 춤 대신 통통 튀는 동작을 선보이는 씨씨와 그런 그를 붙들고 고개를 저으며 말리는 민제프가 확연히 대조됐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씨씨는, 예법과 권위가 사방에서 옥죄어오자 당황하고 경악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고 저항한다. 유일한 희망인 요제프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막막한 현실의 벽과 마주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당신마저 날 버리겠다는 거군요" 하고 체념한다. 난 나의 것. 빼앗긴 자유에 혼란스러워하던 어린 소녀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며 주체적이고 단단한 성인으로 우뚝 선다. 난나것 중반부터 눈빛과 목소리에 굳건함이 실리고, 마침내 찬란한 자유의 기쁨을 온몸으로 내뿜는다. 변화하는 감정과 생각을 오롯이 담아낸 이 넘버에 전율이 일었다.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씨씨는 결국 요제프에게 최후통첩을 던진다. 자신을 부르는 죽음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든 씨씨는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간다. 꿈을 꾸듯 환한 얼굴로 죽음의 손짓에 이끌려 움직이던 씨씨는, 그대로 멍하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코 앞의 죽음을 마주한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현실로 돌아온 그는, 그 유혹을 내치듯 떨쳐내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난나것 맆에서 황후의 우아하고 눈부신 자태와 강인하고 꼿꼿한 의지가 완벽한 1막 피날레를 선사했다.





탄젠빌. 엘리자벳은 고고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승리를 자축한다. "둘이서" 라는 죽음의 말에 "홀로," 하며 강한 목소리로 반박한 신엘리는, 제 앞을 스쳐지나가는 죽음 따위는 우습다는 듯 확고한 자신감을 얼굴 가득 띄운다. 온전한 자유를 만끽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겠노라 선언하는, 가장 찬란한 순간. 자신만만하던 그는, 요제프의 배신과 건강의 악화, 나이듦으로 점차 힘을 잃어간다. 정신병원에서 비록 몸이 묶였지만 영혼은 자유로워 보이는 이를 만난 엘리자벳은, 위태롭고 외롭고 두려운 스스로의 모습에 절망한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자신은 미칠 용기조차 없다며 허망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는 신엘리 감정이 너무 좋았다. 타인의 광기를 동경하는 엘리자벳의 심정이 이해가 됐고, 그래서 귀신과 대화를 나눈다는 비정상적인 행동의 개연성이 생겼다. 아버지를 발견한 그가 어린 시절에 꿈꾸며 부르던 노래를 부른다. 똑같은 가사를 노래하는데, 어린 씨씨와 나이가 들어버린 엘리자벳의 목소리가 완전히 다르다. 솔직함에 투명하기까지 했던 씨씨의 목소리는 시간과 삶이 쌓여 묵직하고 중후해졌다. 지쳐버린 인생을 살아내다가 문득 마주한 티없던 소녀의 모습은, 아득한 망연함과 괴로운 자괴감을 야기하는 법. 흔들림 없이 우아하고 근엄한 목소리에서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그의 영혼이 느껴졌다.



그렇게 온통 자기자신에게만 파묻힌 엘리자벳은, 간절하게 도움을 구하는 제 아들마저 외면한다. 그렇게 증오하던 대공비 소피의 테마곡의 반주 위에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건조한 목소리를 얹는다. 자신을 저버렸던 사람들처럼 되어버린 엘리자벳은 루돌프의 죽음 앞에서야 잘못을 깨닫는다. 삶 내내 거부해왔던 죽음을 애타게 부르짖는 그에게, 죽음은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심연으로 침잠해버린 모습으로 조각배를 띄우며 행복은 너무나 멀리 있다고 자조하는 엘리자벳. 끝내 요제프를 거부한 그는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죽음과 마주한다. 죽음을 발견한 순간, 칼에 찔려 고통스러워 하던 얼굴에 평안함과 기쁨이 번진다. 이 세상은 가라앉게 두고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내딛는 걸음이 너무나 홀가분했다. 평생을 지독히 갈구해온 자유를 비로소 손에 쥔 엘리자벳은 본래의 모습으로, 어린 씨씨로 돌아간다. 수많은 사건을 겪어내고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며 끝까지 삶을 살아낸 그의 발걸음은 미련 없이 가볍다. 그렇게 그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치열했던 인생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다.





다른 배우들이나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와 국회를 부르짖는 시대상에 대한 생각도 남기고 싶었는데, 막상 쓰려니 문장이 엮어지질 않는다. 엘리자벳의 일대기가 워낙 강렬하여 호불호를 남길 의욕이 생기지 않네. 드높았던 기대치보다 더 훌륭한 신엘리를 이대로 보내기 아쉬워서 일단 성남공 티켓팅을 해볼 예정이다. 앞자리 잡으면 자둘자막하고, 그 후기에 정돈되지 않은 이 감상들을 담아야지. 꿈꾸던 극의 타이틀롤을 훌륭히 해내신 신영숙 배우님께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내며, 앞으로도 다채롭고 신선한 역할과 연기와 노래로 만날 수 있길 고대해본다. 신엘리 완전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