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Musical

지킬앤하이드 (2018.12.13 8시)

누비` 2018. 12. 14. 17:05

지킬앤하이드

in 샤롯데씨어터, 2018.12.13 8시 공연


 

 

홍광호 지킬/하이드, 해나 루시, 민경아 엠마, 이희정 어터슨. 이하 원캐. 지킬 라센 공연 자첫.

 

※해당 회차에 대한 배우 얘기 없음. 극에 대한 극불호 주의※

 

관극 내내 양가적인 감정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불편한 전개와 역겨울 정도로 불쾌한 장면들이 견디기 힘들 정도였지만, 명성에 걸맞는 화려하고 압도적인 넘버들이 휘몰아치며 꼼짝 없이 객석에 머물도록 만들었다. 이 극이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잘 팔리고 있는 것은, 한국 뮤지컬이 깊이 있는 연출보다 배우 개인의 역량에 더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원탑극의 형태를 비하하거나, <지킬앤하이드> 를 사랑하여 꾸준히 만들고 소비하면서 입지를 탄탄히 구축해온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소재의 가치를 이해하며 눈과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몇몇 장면들의 극단적인 매력을 공감하고 공유하는 입장으로서, 15년 간 꾸준히 올라온 지앤하를 모독할 의도는 없다. 다만 대극장에서 목격할 수 있는 가장 정체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이 뮤지컬이, 뮤덕에게도 비뮤덕에게도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이 답답한 것이다. 개연성 없이 오로지 강렬한 주인공과 그 넘버들만 유의미하게 남는 극이 오직 지앤하 뿐인 건 아니지만, 지앤하라는 작품이 지닌 견고한 평판이 여타 극과 같지 않기 때문에 더 날카롭게 평가해야 한다. 고민도 변화도 발전도 없이 그저 태만하게, 스타캐스팅으로 자리만 잘 팔며 계속 무대에 올리는 극의 가치는 무엇인가. 과거를 답습하며 정체된 작품만이 범람한다면, 공연예술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안다. 류지킬/류하이드가 왔다면 불편한 모든 요인들을 애써 무시하고 희석하면서, 자발적 고통을 감내한 채 적든 많든 여러 번 관극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렇게 15년도 라만차 회전을 돌았던 전례까지 있다. 그래서 더 힘겨웠다. 류지킬과 류하이드가 어떻게 노래하고 어떻게 연기하며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무대를 휘어잡을지 가늠이 되기에 너무나 궁금했고, 상상이 되기에 갈급하고 간절했다. 그리고 이런 스스로의 이중성에 자괴와 번민이 들었다. 극은 끔찍할 정도로 싫은데,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너무나 완벽하게 소화했던 캐릭터는 그저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여 지독히도 보고 싶다는 것이 고통스럽고 못내 슬프다. 입덕하자마자 십주년 지킬 지방공 막공만 보고 끝낼 걸, 하는 답지 않은 후회마저 들 정도로 마음이 어지럽다. 그저 딱 한 번만 류지킬/류하이드를 실제로 보고 듣고 마주할 수 있다면, 이 극 자체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사라질 것 같다. 이번 시즌 특공 10회차 정도만 해주시고 지앤하 졸업해주시면 안될까요, 하는 닿지 않을 부탁이 구질구질하고 부끄러운데도, 배우님을 향한 끝모를 신뢰와 애정이 이 마음을 끝없이 간절하게 만든다. 류배우님의 팬이면서 류지킬/류하이드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힘겹고 벅차다.

 

 

선과 악을 분리하여 인간을 치료하겠다는 원대한 목적으로 실험을 시작하였으나, 분리된 두 개의 자아가 서로 팽팽히 대립하며 끝내 통제가 불가능한 파국으로 치닫는 이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고 자극적이며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인간 본성에 내재된 선악에 대한 가치 판단 여부, 온전한 선과 온전한 악이 구분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 분리된 선이 과연 절대적인 '정상' 의 상태인 것인가에 대한 회의, 별개의 자아의 공존가능성과 부작용 등, 여러 철학적 질문들이 질색하며 관극하는 와중에도 자꾸 떠올라 고민을 거듭하게 했다. 그러나 지킬과 하이드의 정체성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굳이 성녀(엠마)와 창녀(루시)라는, 지긋지긋한 여캐의 이분법적 양극단을 내세워야만 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들어서 내내 불쾌했다. 배우가 자신의 능력으로 극에 고정된 상황과 전개를 찰떡같이 노선에 녹여 설득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극의 근간에서 비롯된 불편함이 해소될 리 없다. 뮤덕으로서, 소비자로서, 무대예술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관객으로서, 배우의 재능과 열정 뿐만이 아니라, 제작 및 연출의 고민과 시도와 노력과 변화를 통한 극의 완성도를 바란다. 빌리엘리어트 후기에서 제기했던 의문을, 반 년이 지난 지금 재차 묻는다.

 


다만 공연이라는 장르는 책처럼 글로써 존재하거나, 그림처럼 종이 위에 남아있거나, 음악처럼 음표로써 존재하거나, 영화처럼 시대와 기술의 한계가 감안되는 영상으로써 남아있는 2차원의 예술이 아니다. 극이 무대 위에 올라오는 바로 그 시점에 어떻게 관객과 교류하고 공감하고 공명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예술이고, 그렇기에 낡고 오래된 소재를 다룸에 있어 타 장르보다 더 치열하고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 이 땅에서 공연을 만들고 있는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대해 이러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 생각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

- 빌리엘리어트 (2018.05.04 8시) 후기 中 (링크: http://tinuviel09.tistory.com/515)


 

 

무대 위에서 어린 소녀 역을 맡은 배우가 늙고 타락한 남성 역을 맡은 배우에게 희롱당하는 모습을 강제로 1분 가까이 보고 있게 하는 것은 간접적 폭력이다. 대극장 극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창녀촌은 여성의 대상화를 보다 공고히 만드는 폭력의 재생산이다. 성녀와 창녀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은 성에 따른 한계를 긋고 편견을 고착화 시킨다. 아슬아슬하고 치명적인 외줄타기가 아닌, 힘과 권력을 지닌 쪽이 지니지 못한 쪽을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제압하는데 집중한 연출은 예술이 아닌 외설에 불과했다. 뒷배경의 집단 난교 연출까지 더불어, It's A Dangerous Game 연출 전반은 이 매력적인 넘버를 완전히 짓뭉개고 폄훼했다. 동제작사의 극인 맨오브라만차 윤간씬과 다를 바 없는 시각적 폭력이 너무나 끔찍해서 결국 그 때처럼 장면 내내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포기하기 어려운 엄청난 장면들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끔찍한 장면들이 극악하게 공존하는 극이라서 피곤하다. 이야기 전개를 위해 절망적이고 참혹한 상기의 장면들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용인하고 납득 가능한 전제 위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 정도를 지키지 못한다면, 감히 단언컨대 그건 예술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예술이 인간을 상처 입힌다면, 그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단순한 불호극이면 욕하고 치우면 되는데, 명성과 인기를 지닌 스테디셀러이기 때문에 힘겹게 문장을 엮고 있다. 비판이라 명명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의 후기인데다가, 올곧게 손가락질만 하면 되는 입장도 아니라서 더욱 어렵다. 모든 인간은 지킬과 하이드가 공존하는 다면적 존재임을 알기에, 이 고통과 번뇌가 불유쾌하지만 견디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옳지 않은 것, 불편한 것,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 반드시 고쳐나가야 하는 것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용기 있게 지적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을 뿐이다.

 

류지킬/류하이드가 돌아온다면 늦덕으로서 감사히 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첫자막할 예정이다. 이 끔찍한 감정을 또다시 견뎌낼 자신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겠다. 연출을 조금만 수정해도 이렇게까지 발작적으로 혐오하지 않을 수 있는 극이라는 점이 불쾌감을 새삼 가중시킨다. 2차 캐스팅에 기적이 묻을 확률이 다분히 낮다는 것이 비보인지 낭보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본다면 여한이 없겠지만. 참으로 어렵고 힘들고 고된 덕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