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 (2017.12.07 8시)
모래시계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17.12.07 8시 공연
한지상 태수, 조정은 혜린, 최재웅 우석, 강홍석 종도, 이호원 재희, 손종학 윤회장, 이정열 도식. 핝태수, 선녀혜린, 웅우석. 한선녀웅. 모래시계 프리뷰 공연. 아마 자첫자막. 몹시 낮은 기대치에 비해 프리뷰 첫공 후기가 꽤 좋아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자첫을 앞당겼다. 헤드윅 마언니 세미막 이후 한 달이 넘게 관극을 쉬고 있었는데, 초연 창뮤에 좋아하는 배우들이 무대에 서니 로딩 따위를 고려할 필요가 없겠다는 믿음에 공연 시작 2시간 전 관극 결정을 하고 충무로 향했다. 익숙하게 입장해서 자리에 앉았는데, 공연 시작 전 시계 그림 몹시 거슬려서 죽을 뻔했다. 분침이랑 시침이 너무 안 맞아...... 분침이 5분인가 그랬는데 시침은 거의 4-50분 된 위치에 떡하니 놓여있어서 시작 직전까지 거슬렸다.
일단 스포 없이 전반적인 총평을 해보자면,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고 각오했던 신파나 촌스러움이 없었다. 조금 유치하다거나 7-80년대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부분은 확실히 존재했지만, 이 극의 타겟층에게는 아주 잘 먹힐 요소였다. 소위 국민드라마라 불리는 모래시계 원작을 본 적은 없지만, 극의 전개를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24부작의 긴 이야기를 세시간 남짓에 과함이나 부족함 없이 잘 담아냈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 혹은 1막이 길다, 라는 평가가 이해되지만 제작자 입장에서 보면 최선이자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런닝타임이 조금 길더라도 1막 내내 지루하지 않게 관객을 이야기에 끌어모으고, 2막에서 화려한 쇼뮤 무대로 시선을 빼앗은 뒤 바로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진행 전반에 적절한 개연성이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기억되는 엄청난 히트작을 이 정도로 각색한 것만으로도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원작을 본 사람은 본 사람 대로, 잘 모르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 극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은, 장르를 달리 한 재창작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추가 점수를 좀 더 주자면, '지금 시대'에 적합하게 만들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 선명했다. 조폭 등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빠지질 않는 구시대적인 소재와 마초적인 분위기를 싫어하고,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를 풀어낼 방식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이 컸다. 그러나, 불편하지 않았다. 솔직히 많이 놀랐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공연들에서 극의 전개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혜린은 주체적으로, '인간' 한 사람으로서 무대 위에 존재한다. 성별에 구애 받거나 제한 당하지 않는, '온전한' 여성 캐릭터로서 말이다. 커튼콜 때 '정중앙'에 혜린이 서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여자 앙상블의 직업도 다양하다. 군인이든 경찰이든 조폭이든 검사든, 극 중 모든 직종에 여성과 남성이 공존한다. 나폴레옹도 군인에 여앙들이 많아서 오히려 군무가 다채롭게 다가올 때가 있었는데, 모래시계도 비슷했다. 재희 솔로곡에서만 앙상블이 전부 남자였던 것 같다. 이 외에도 대사나 내용에서 불쾌함을 느끼지 못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정상적인' 극을 마주해서 얼떨떨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음악은, 엇박에 가사가 너무 많아서 도리안그레이를 연상시켰다. 작/편곡은 안하셨지만 음악감독으로서 실제 오케를 지휘하시는 김문정 음감님 스타일로 느꼈다. 반복되는 구절이 많았음에도 노래가 콱콱 귀에 꽂히지는 않았다. 이건 충무 음향 탓도 조금은 있는데, 극 올라온 초반에 음향을 항상 못잡아서 항상 짜증이 난다. 아무튼 앙상블 떼창에 뭔가 익숙한 목소리들이 섞여서 인터 때 찾아보니 도리안 했던 배우분들이 좀 있으시더라. 역시 오슷이 남으면 극이 오래오래 기억된답니다! 관계자님들, 듣고 계신가요? 1막 우석 솔로 넘버인 '검사의 기도' 의 가사들이 가슴에 박히며 펑펑 눈물을 쏟았다. 웅우석의 눈에 일렁이는 그 감정들이 어찌나 드라마틱하고 설득력 넘쳤는지 모른다. 오늘 프레스콜은 요정우석으로 박제됐네. 태수만 박제하지 말고 혜린이랑 우석도 캐슷 별로 뮤비 주세요!!! 무대 구조물은 여러모로 변형시키며 잘 활용했다. 전반적으로 안정감 있었는데, 2막인가 테이블 위에서 태수가 넘버 마무리하며 포즈 취하는데 바로 무대가 상수 쪽으로 움직이니까 배우가 휘청해서 놀랐다. 그네 구조물은 상당히 튼튼해보였고, 천장의 갓 달린 조명들도 잘 사용하더라. 아무리 시대고증 운운하더라도, 덕간적으로 양복 핏은 어느 정도 수준을 좀 맞춰주시죠. 선녀혜린 청바지에 포니테일은 정말정말 예뻤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상당히 괜찮아서 주변 어른들에게는 망설임 없이 강추할 수 있다. 공연 끝나자마자 부모님에게 보러가시겠냐고 물어봤을 정도니까 말 다했지. 작년 그날들에서 이정열 배우를 아주 인상 깊게 보신 두 분이라서 정열도식 회차로 잡아드릴까 생각 중이다. 존재감이 장난 아니셔서 속으로 엄청 감탄했다.
※스포있음※
모래시계에 대해 알고 있던 내용은 검사가 어릴 적 친구였던 조폭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라는 큰 줄거리와 명대사 몇 개, bgm, 그리고 '광주' 라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관극을 했는데 내가 못 들은 건지 아니면 정말 없는 건지, 저 이름은 전혀 없더라. 일부러, 예민한 소재여서 생략한 것이라면 매우 실망이다. 79년 박정희의 죽음 이후인 우석의 입대와, "사람을 죽였다" 는 절규를 통해서 그가 광주에 '군인으로' 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었으리라 짐작했다. 그 충격과 절망과 공포의 감정이 얼마나 깊고 강렬할지 짐작이 되었기에, 바로 이어지는 검사의 기도 넘버가 더욱 아프게 와닿았던 것도 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내 짐작이 맞았고, 후배인지 친구인지 때문에 광주에 와있던 태수와 군인이었던 우석이 잠깐 만나는 장면도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석이 무대 가운데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있을 때 태수가 수레에 실린 부상자를 끌고 지나가고, 총에 맞은 시민을 끌어내긴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쳤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우석의 인생에서 끔찍하리만치 중대했던 이 사건을, 가능한 선까지 뭉뚱그린 연출 상의 이유를 잘 모르겠다. 뒷 배경에 스치는 사진들이 80년 광주였나 돌이켜봐도, 전혀 익숙하지 않은 장면들이었다. 이 부분을 확인하고 싶어서 자둘을 해볼까 싶긴 한데, 자첫은 압축 드라마 보듯 흥미롭게 봤지만 자둘은 지루하거나 아쉬울 것 같아서 고민이 된다.
웅우석은 연기의 안정감이 아주 매력적인 배우다. 중심을 단단하게 박고 있기에, 빠른 전개나 시간선을 넘나드는 부분에서도 감정을 적절하게 농축시켜 전달한다. 이날 앉은 자리 바로 앞에서 우석이 노래를 많이 했는데, 덕분에 넘버를 부르며 차곡차곡 감정을 쌓는 눈빛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선녀혜린은, 그냥 완벽했다. 이 배우를 엘리자벳이나 몬테 등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역할로만 봐서 아름답고 예쁜, 별명 그대로 '선녀 같은' 멋진 배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표현하는 혜린을 만나보니 이 배우의 실력을 하나의 고정적인 이미지로 한정짓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됐다. 캐쥬얼한 차림에 당차고 고집 있고 자기 정체성 강한 현대물이 이렇게 찰떡 같이 어울릴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극의 제목이기도 한 '모래시계'라는 소재를 자기 솔로 넘버로 부르고, 주어진 상황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변화하는 혜린을 너무나 멋지게 보여줘서 관극 내내 감탄을 거듭했다. 핝태수는 배우 본인이 몹시 잘하는 요소들을 살리며 매끄럽게 극 안에 녹아들었다. 장면이나 행동, 위치, 소품들 때문에 전작 나폴레옹이나 프랑켄슈타인 등의 지뢰들을 여러 번 밟았다.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겉멋을 양념처럼 첨가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가 빨갱이' 라는 낙인 때문에 인생의 목표가 무너지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생의 의미가 사라진 이후, 핝태수에게는 내내 패배감이 깔린다. 배우가 어느 지점에 포인트를 맞췄는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태수의 주요 정체성 중 하나인 깡패가 잘 보이지 않아서 캐릭터가 살짝 밋밋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필요한 몇몇 장면들에서 약간 껄렁한 느낌을 첨가한다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온 동시에 격동하는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여러모로 흥미롭게, 무엇보다 재미있게 관극한 공연이었다. 이토록 기대에서 어긋나준 점이 매우 고맙기까지 하다. 일종의 휴덕 상태여서 자첫자막을 고수할 것 같긴 하지만, 프리뷰 공연으로 자막하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둘 정도는 할 의향이 있다. 요새 관극의지가 너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