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2024.07.18 8시)
에밀
in 예스24스테이지 3관, 2024.07.18 8시
박영수 에밀 졸라, 김인성 클로드. 슈에밀, 린클로드.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로 유명한 작가 에밀 졸라를 다룬 창작극이 올라온다기에 꼭 보고 싶었다. 개막 이후에는 나름 쫀쫀한 텍스트를 보유한 2인극이라는 평이 나왔기에, 연극 <라스트세션>을 좋아했던 관객으로서 한층 두근거렸다. 물론 연극이 아닌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한계 또한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터라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고 객석에 앉았다. 아쉽게도 관극하는 동안 특별히 가슴이 뛰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무대예술의 매력이 무엇이었는가를 오랜만에 되새겼다. 분명히 '아주 잘 만든 극'은 아닌데, 지나친 미화나 우상화 대신 현실적인 고통을 앞세운 덕분인지 묘하게 마음을 이끄는 지점들이 있었다. 공연을 보며 눈물을 떨군 건 오랜만이기도 하고.
"나는 고발한다 비겁한 프랑스를
나는 고발한다 우둔한 사람들을
나는 고발한다 가리워진 진실을
나는 고발한다 죽어버린 양심을"
진실을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식인이라는 소재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진실은 드러날 거야"라며 비겁하게 침묵할 수 없노라 외치는 에밀을 보고 있자니, 가짜뉴스와 근거 없는 비난이 난무하는 현실이 떠올라 심장이 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클로드의 중얼거림에서는,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이들을 폄훼하며 진실을 애써 숨기려는 견고한 카르텔이 떠올라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고.
오랜만에 만난 박영수 배우는 역시 능숙했다. 길고 납작한 몸에 딱 맞는 쓰리피스 정장의 실루엣부터 설렜다. 이 배우 특유의 꼿꼿한 몸과 부드럽지만 날카로움이 담긴 목소리 톤을 무척 좋아하는데, 이 장점들이 100분 내내 고스란히 드러나서 만족스러웠다. 하얗게 센 머리와 두터운 테의 안경이 평소와는 다른 인상을 풍기는 점도 좋았다. "아무리 진실을 땅에 묻어도 언젠가 땅을 뚫고 나와 온 세상에 드러날 거야!" 하고 외치는, 분노와 단호함이 뒤섞인 대사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고. 그저 무대에 서있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가는 배우들을, 보통 애배라고 부른다지요. 확고한 취향을 뛰어넘는 매력이 있는 배우들이 꾸준히 무대를 해줘서 고맙다. 내가 자주 보러 가야 하는데.
김인성 배우는 자첫이었는데, 기대 이상인 부분이 있어서 차기작을 챙겨볼 거 같다. 극 초반의 '이 펜은 내게 말을 걸어' 솔로 넘버에서 의외의 흡입력을 내뿜으며 클로드에게 몰입하게 했다. 잔잔한 곡은 애매한 분위기를 풍길 때가 더러 있는데, 관객의 박수 없이 바로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넘버의 마무리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린클로드의 이야기를 듣는 슈에밀 표정과 자세도 진짜 좋았는데, 이 페어 박제가 없는 듯. 이외에도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는 대사 톤이나 깊이 있는 발성, 안정적인 넘버 소화력도 괜찮았다. '빠담 빠담'에서 바닥에 드러눕는 슈에밀의 행동에 당황하지 않고 잘 이끌어가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무대에 정성을 다하는 배우는 언제나 응원할 수밖에 없지.
다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 어미가 너무 현대적이더라. 본인의 입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연습한 점은 좋았지만, "하게, 하세"체를 사용하는 슈에밀과 시대적 차이가 느껴졌다. 일단 초반에 "여튼," 하고 시작하는 대사를 듣고 내적 경악을 함. 20세기 초반에 까마득한 대문호를 만나는 후배가 사용할만한 단어는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눈 돌아가는 연기가 생각보다 아쉬웠음. 예정된 반전의 장면에서 180도 변해버리는 연기는 쉽지만 까다로운데, 보는 이의 인상에 강렬하게 꽂히는 타격감이 부족했다. MSG가 꼭 필요한 아니지만, 창작진이 작정하고 집어넣은 맛깔나게 활용하는 건 배우의 역량이니까.
극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애매함은 별개로, 생각보다 재미있게 관극하여 뿌듯하다. 조금만 더 마음에 들었으면 자둘했을지도. 재연이 올라온다면 바닥 높이가 다른 무대에 대한 재고와 '빠담 빠담' 직후의 클로드 동선 및 행동지문 수정을 부탁드립니다. 배우가 위험해보이거나 무대에서 산만하게 움직이면 관객의 몰입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근시일 내에 관극 하러 또 대학로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