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Musical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2022.12.14 7시반)

누비` 2022. 12. 15. 09:42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2.12.14 7시반

 

 

 

 

박강현 토니, 한재아 마리아, 정유지 아니타, 정택운 리프, 임정모 베르나르도, 이하 원캐.

 

 

뮤지컬 계의 고전이나 다름없는 이 극이, 지난 2007년 삼연 이후 무려 15년 만에 라이센스 사연으로 돌아왔다. 류정한 배우님의 데뷔작이자, 작곡가 번스타인의 작품이자, 미드 글리 등을 통해 대부분의 넘버를 이미 잘 알고 좋아했기에 반드시 챙겨봐야만 하는 극이었다. 간만에 대극장 특유의 스케일 큰 군무와 빵빵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고 들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익숙한 음악과 함께 맞물리는 배우들의 동작이 무대 위 특별한 세상을 펼쳐냈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답게, 이 극은 두 세력의 팽팽한 대립과 그 사이에서 피어난 애틋한 사랑을 소재로 한다. 독특하게도 웅장한 떼창과 강렬한 솔로곡보다는, 탄탄한 몸의 근육을 끊임없이 사용하는 군무와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듀엣곡을 중점으로 두고 있다. 1막 후반부 Tonight Reprise 넘버는 레미제라블 1막 피날레의 One Day More 넘버를 연상시키는데, 중심인물들과 각각의 집단이 지닌 서로 다른 생각을 각기 다른 가사로 노래하며 하나의 거대한 노래를 완성한다. Maria 넘버 등 메인 넘버의 멜로디를 후반부의 클라이막스에서 리프라이즈처럼 활용하며 극 전체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감정을 끌어올리는 음악 연출이 대극장 뮤지컬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새삼 절감케 했다.

 

 

먼저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집단과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새로이 미국에 발을 디딘 이민자 집단의 갈등은 필연적이었을까.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쓰레기 양아치라고 언제나 편견 어린 시선을 받던, 아직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의 주변에는 좋은 어른이 부재한다. 서로만을 의지하기 위한 또래집단을 형성한 그들은 소속 외의 사람들에게 한껏 날을 세우며 폭력마저 불사한다. 그 혐오와 배척이 어떠한 비극을 야기할지 미처 상상하지도 못한 채.

 

 

아이들의 집단의식은 입고 있는 의상의 톤을 통해 시각적으로 구분된다. 푸에트 토리코 출신의 이민자 집단은 베르나르도의 붉은 상의를 비롯하여 대부분 웜톤이며, 먼저 미국에 자리 잡은 폴란드계 미국인 집단은 제트의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를 위시한 푸른 쿨톤이다. 군무 역시 이민자 집단은 라틴 아메리카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미국인 집단은 발레를 차용하여 팔다리를 길게 뻗으며 점프하는 동작이 많다. 경찰의 저급한 배격에 이민자 집단 샤크의 아이들은 분노를 꾹 집어삼키며 휘파람으로 그들의 노래를 부른다.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기 어려워하던 미국인 집단 제트의 아이들은 핑거스냅을 반복하며 마음을 차갑게 진정시킨다. 이 극의 주된 갈등은, 노래 외의 요소들로 표현된다.

 

 

 

 

택리프가 제일 궁금했는데, 다른 배우들과 합을 많이 맞춰본 티가 났다. 힘을 과하게 주지 않고 부드럽게 리프라는 인물을 구축한 점이 좋았는데, 덕분에 다른 배우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다 같이 돋보였다. 개인적으로 첫 넘버는 무난했으나, Cool 넘버가 정말 좋았다. 프랑켄슈타인 사연에서 바꿔왔던 뮤지컬 발성을 사용하여 택앙리 때 좋아했던 풍성한 중저음의 소리를 내줬다. 이 넘버 박제 좀 해달라, 쇼노트여. 정택운 배우의 뮤기작이 계속해서 기대가 된다. 

 

 

유지아니타 최고였다! America 넘버의 매력을 완벽하게 살리며 사랑스럽고 매력적으로 무대를 누볐다. 유지아니타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적당히 은유적인 클라이막스 장면 전후의 감정 연기가 그의 행동을 명확하게 이해시킨 부분도 좋았다. 재아마리아는 배우 자첫이었는데, 꾀꼬리 톤이 아닌 성악 발성은 익숙지 않아 처음에는 낯을 가렸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연기에서 모든 낯가림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예상했던 비극임에도, 재아마리아의 그 온몸으로 울음을 쏟아내는 연기가 지독히 절절하고 애틋하여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극 중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쌓아 올렸다.

 

 

깡토니를 보며 영원히 볼 수 없을 류토니를 문득문득 상상했다. 눈을 반짝이며 부르는 Something's Coming 넘버, 애틋하게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황홀한 Maria 넘버, 달달하게 사랑을 쏟아내는 Tonight 넘버까지. 깡토니의 풋풋하고 단단하며 저돌적인 사랑이 사랑스러운 만큼, 토니라는 인물의 매력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벌크업을 잔뜩 해온 정모나르도 역시 안정감 있게 눈에 띄는 캐릭터를 소화했다.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는 앙상블 배우들을 보느라 눈이 모자랐다. America 넘버의 여앙들 군무도 짜릿했으나, 2막 I Feel Pretty 넘버 화음이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다. Gee, Officer Krupke! 넘버를 맛깔나게 살리는 제트 남앙들도 매력적이었고!

 

 

충무 대극장 무대라서 그런지, 사회의 비주류에 속한 아이들이 몸을 내던지는 극이라서 그런지, 다닥다닥 붙은 여러 층의 건물들이 무대 구조물의 전부라서 그런지, 군무가 많아서 그런지, 혹은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그런지, 2016년에 관극했던 뉴시즈 생각이 많이 났다. 2막 첫 장면에서 중앙 무대 구조물이 회전하는 장면에서는 레베카도 떠올랐다. 은근한 박자 밀당에서 손드하임의 숨결이 물씬 느껴졌는데, 찾아보니 손드하임이 작사가로 참여한 극이자 손드하임의 브로드웨이 데뷔작이더라. 스위니토드도 오랜만에 보고 싶은데 여력이 나질 않네. 

 

 

 

 

이 작품은 주조연 배우들과 앙상블 배우들이 모두 동일한 페이를 받아야만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끊임없는 군무를 위해 배우들이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는지가 고스란히 보이더라. 이제 개막 한 달 차라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것도 느껴졌다. 막공 즈음이 되면 어마어마한 시너지가 나오겠지만, 그만큼 매일매일 무대에 오른 부담이 온몸에 누적되어 결국 체력과 정신력을 불사르리란 예상이 된다. 막공까지 아무도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공연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막 내리기 전에 한 번쯤 더 만나고 싶은데,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다. 덕분에 오랜만에 충만하고 행복한 관극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