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2022.09.30 7시)
엘리자벳
in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2022.09.30 7시
옥주현 엘리자벳, 이해준 죽음, 박은태 루케니, 길병민 요제프, 주아 대공비 소피, 장윤석 루돌프, 김유안 어린 루돌프, 이하 원캐. 10주년 엘리자벳 자첫자막.
개막도 하기 전부터 말이 많았던 이번 엘리 10주년을, 팔아주지 않으려 했다. 뮤지컬에 입덕한 이후로 늘 궁금했던 은케니가 돌아왔기에 이 불매 결심은 가슴을 미어지게 했지만, 그래도 제작사를 비롯한 여러 요소들을 용납하기엔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뭐라도 관극을 하기 위해 하루 종일 새로고침을 하다가 퇴근하며 사옥의 회전문을 나서는 바로 그 순간, 꿀자리가 눈에 들어와 버렸다. 이런 제기랄. 왜 매번 똑같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거야. 난 그저 행복하고 싶은 덕후라고. 좋은 극 올릴 때 제발 극 외적으로 문제 좀 일으키지 말라! (엠개만이 아니라 블테도 들어라. 걔 JCS 하차 안 시키니?)
아무튼 이 힘없고 어리석은 덕후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욕망에 자존심을 잠시 팔아넘긴 채 블퀘의 객석에 앉았다고 합니다. 못 본 척하기엔 지나치게 좋은 자리였단 말이다.
높디높은 기대치를 배신하지 않고, 은케니는 상상하고 바라던 모든 것을 충족시켜줬다. 번뜩이는 눈빛, 잔망스러운 동작, 과장스럽게 예의를 차리는 척하는 비아냥 가득한 몸짓, 거리낌 없이 행동하며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존재감, 삽시간에 돌변하는 표정과 분위기, 비릿한 조소와 위선적인 표정, 흰자를 드러내며 광기를 이글거리는 마지막 찰나까지. 그동안 대체 왜!!! 루케니를 안 하신 겁니까!!! 금지되었던 극장 내 함성이 슬슬 풀리고 있는 시점에도 쉽게 나오지 않던 환호는, 은케니 밀크 넘버 하나에 자제할 틈도 없이 터져 나왔다. 커튼콜의 은케니에게도 비명 같은 환호성을 아낌없이 지르며 간만의 짜릿함을 만끽했다. 이토록 즐겁고 행복한 대극장 관극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물론 완전히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1막에 옥엘리 배우 본체에 대한 반감이 흐릿해졌으나, 2막에서 극불호를 맞이하고 괴로웠다. 캐릭터 해석의 문제인가 연출의 문제인가 둘 다인가. 1막 초반 론도 자체도 최악이었는데, 2막 옥엘리 노선에서 그 넘버의 가사가 겹쳐져서 몹시 별로였다. 정신병원 장면의 '아무것도' 넘버와 '행복은 너무도 멀리에' 넘버를 아무런 감흥 없이 듣는다는 게 통탄스러웠다. 애초에 2막은 탄젠빌부터 감이 왔다. 이 엘리는 나랑 안 맞는다고.
해준토드를 보며 7년 전에 딱 한 번 만난 동토드가 자꾸 떠올랐다. 목소리도 외모도 다른데, 노선과 그에 따른 동작 디테일 및 표정이 매우 닮았더라. 턱을 치켜든 채 눈을 내리깐 오만함과 제 잘난 맛으로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치기에 가까운 자신감으로 2차원 만화책을 찢고 나온 듯한 죽음 그 자체를 표상했다. 등장이 적은 1막에서는 동토드와 비슷하다는 단상뿐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이곳저곳에서 등장하는 2막에서는 해준토드가 등장할 때마다 동토드가 겹쳐 보여서 자꾸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노래 잘하고 길쭉하니 귀와 눈이 이미 풍족한데, 아련한 추억까지 더해지니 더없이 흡족했다. 앞으로 대극장에서 자주 만날 수 있으려나. 동토드도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살짝 어색하고 줏대 없어 보이는 젊은 길제프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을 어울리게 담아냈고, 후반부의 늙은 요제프는 깊은 저음이 많아서 풍성하고 묵직하게 잘 소화했다. 주아소피 역시 괜찮았다. 정화소피를 대공비의 기준이라고 여기고 있기에 중간중간 살짝 그가 그립긴 했지만, 주아소피도 일관성 있게 자신의 대공비를 구축하여 보여줬다. 애초에 이 극의 다채로운 여성 인물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1막에서도 엘리의 난나것을 들으며 심장이 절로 벅차올랐는걸. 볼프 살롱에서 몸 파는 여자 전시하는 장면은 극혐 그 자체이니 논외다.
EMK 뮤지컬 컴퍼니는 제발 무대 구조물 좀 안전하게 만들라. 요제프 집무실 바닥은 디스코팡팡 놀이기구처럼 기우뚱거리며 호숫가와 궁전의 벽과 침대 전후좌우 발판이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불안한 꼴을 대체 왜 관객이 감내해야 하는가. 10주년 프로덕션이라며. 10년 내내 왜 이따위로 무대를 만드냐고. 티켓값 다 어디다 쓰냐고.
은케니 하나로 충만한 관극이었다. 정가 15만원 중 단 1원도 아깝지 않았어. 심지어 키치 때 은케니가 던져준 전단지도 받았어!!!!! 은케니 사랑해요! 만세! 최고! 더 만날 수 없는 건 아쉽지만, 그럼에도 돌아와줘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덕분에 연뮤 버킷리스트를 이렇게 또 하나 지워봅니다. 은케니 최고! 끝까지 무대 위에서 신나게 휘젓고 다니시길!!
덧. 여왕엘리와 류토드와 은케니와 동돌프가 한 무대 위에 존재했던 10년 전 엘리 초연 본사가 새삼스레 또 부러워진다...